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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음알음

서른 넘어 함박눈

지난 토요일, 원룸 속에 앉은 나는 TV리모콘만 붙들고 있었다.

간만에 느끼는 평화로움이라고 오전까지는 괜찮았는데 어쩐지 내 몸덩이가 뭉게뭉게 구름이거나 미끌미끌 아메바가 된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TV에선 눈이 내리고 있다는 오후 뉴스가 나왔다.

대충 차려입고(정말 대충) 일단 집을 나섰다. 가방에 책 한 권, 편지지와 편지 봉투, 휴대폰과 다이어리를 넣었다. 이 소품들로 보면 내 발걸음은 응당 카페로 향해야 했다. 그렇게 '도시인' 놀이에 빠져들었다.


책은 회사 후배가 그냥 준, 분홍색 배경에 함박눈이 내리는 표지를 가진 <서른 넘어 함박눈>이었고, 편지지와 편지 봉투는 지난해 여름 일본 출장길에 사온 세로쓰기 편지지와 잠든 고양이 얼굴이 그려진 편지봉투였다. 여기까지의 소품을 보면, '좀 감성적인 젊은이'나 '시절 좋은 젊은이'나 '사회에는 관심이 없는 젊은이'나 등등으로 비춰질 수도 있었다. 


<서른 넘어 함박눈>은 다나베 세이코의 연애소설 9편을 모은 단편소설집이다. 영화 '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들'의 원작 저자다. 그의 소설을 읽은 건 처음이다. 그래서 그의 이름을 잊지 않으려고 몇번 되뇌였다. (지금은 많이 무뎌진 것도 같은데,) '서른살의 여성'이라는 사회적인 관념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나는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 굳이 서른이라고 노처녀가 되었다고 불안해 하거나, 이제 어른이 되었다고 어깨가 무거워지거나 하는 일 따위는 내게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것이 이상하다거나 미숙하다거나 하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저 하루의 시간이 보다 빠르게 간다는 것과 자꾸 경험해야 하는 상실, 이런 것들이 서글플 때가 있다. 미약한 자신과 마주하는 것이 부끄럽기도 했다.


적어도 이 책을 읽으면서 여성들이 왜 그렇게 나이에 집착하고 그 또래를 지남으로써 결혼과 임신, 출산 등을 이뤄내야 할 것으로 받아들이는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게 됐다. 자신을 객관화하는 데 잣대가 남자인 것만은 분명해보였다. 남자가 곁에 있든 없든, 곁에 있는 남자가 누구든. 또 그것은 남성도 마찬가지라는 생각도 들었다. 20대를 거쳐 30대로 들어가는 문턱에서 자기 자신에 대한 재정립이 필요하고, 이제는 부모가 아닌 곁에 있는 누군가가 자신의 이미지를 비춘 거울이 되니 말이다. 주변에서 너무 '너도 이제 서른이구나, 결혼해야지'라고 잦은 압박성 발언도 날아오지만, 또 일부는 '나이를 개의치 말고, 서른이 되었다고 결혼 타령을 하지 마라'고 한다. 이렇건 저렇건 이 즈음해서 자신을 되돌아보는 건 의미가 있다. 이 책 속의 여성들은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남자를 좋아하는지, 어떤 관계에 집착하는지 고민한다. 그게 나이 탓, 결혼 타령이 되는지도 모르겠다. 그저 조용히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는 혼란스럽기도 하니까. 


드라마 <로맨스가 필요해3>에 나오는 30대 여성들은 일에 집중하고,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해 너무 쿨해 보이고(물론 그렇지만 드라마에선 이들도 사랑에는 서툴다고 말하는 듯하다.) 윤승아 커플을 제외하고는 '경제적인 이유'로 사랑을 고민하지 않는다. 이들이 그저 너무 열심히 사랑을 해서, 30대의 주된 관심사도 '사랑'인가라고 묻게 된다. 서른 넘어서의 사랑은, 소복소복 내리는 함박눈 같은 게 아닐까. 그렇다면 너무 열심히 다가서지 않아도 시간이 쌓이면 다복다복 수북히 쌓이는 것이 아닌가. 내가 보이면, 큰 거부감 없이 같이 있는 상대에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건 아닐까. 이 책의 소개를 보면 "20대와는 매우 현실적인 사랑과 연애"라고 소개하는데, '깜짝우동'처럼 꽤나 낭만적인 결론도 있다.




  (출판사 : 포레)

 



*출판사에서 내놓은 책 속 주요 문장들 소개를 보니까, 흡사 카페에 앉은 내 모습과 닿아 있는 문장도 있더라. 


공상은 돈 한 푼 들이지 않고도 즐길 수 있어 좋다. 남에게 폐를 끼치지도 않는다. --- p.20


남자가 건드려주길 기다리다가도 막상 그런 일이 일어나면 그 즉시 의연하게 퇴짜 놓는 자세를 보이며 살아가야 한다. 기다렸습니다 하는 구석을 보여서는 안 된다. --- p.64


독신은 여러모로 바쁜 것이다. 내 친구들 중에는 호박이 저절로 굴러들어오기를 기다리면서 공상 속에서는 버젓이 행세하지만 현실에서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 엉덩이가 무거운 애들이 많다. 그러면서 해마다 주문이 까다로워진다. --- p.64


멍하니 있다가는 의자놀이에서 마지막에 남겨지는 한 사람이 돼버릴 거야. --- p.66


친구는 무서운 게 없는 사람처럼 큰 소리를 냈다. 어째서 결혼한 여자들은 이렇게 탁 터놓고 큰 소리를 내는 걸까. 온몸을 다 개방했다는 느낌을 주는 것이, 외설스럽기 그지없다. --- p.66


바보 같아서 오늘밤은 영 재미가 없다. 어째서 다른 남자들은 저토록 다정하게 아내를 지켜주는 걸까. 갑자기 추워진다. --- p.76


나는 적당히 어지르며 지낸다. 너무 깨끗이 치우면 외로워져서 울고 싶어질 때가 있다. --- p.77


산페이가 옆에 있어도 난 공기나 마찬가지라고 느껴지는데, 세상 사람들도 모두 그렇게 되어가는 걸까. 여러 가지 것들을 상상한다. 그러는 사이 배가 고파진다. --- p.77


인간이 벌이는 아수라장조차 나는 부러워 견딜 수가 없다. 미워할 수도 있을 만큼 깊이 얽혀 있는 남자가 있었으면 좋겠다. --- p.78


“아직 살아 있어?”

“살아 있어. 무슨 일이야?”

“나, 할 얘기가 있어.”

“나 돈 없어.”

이런 남자이기 때문에 전화번호가 서랍 구석에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던 것이다. --- p.80


결혼할 생각은 들지 않지만 격이 떨어지는 남자가 가끔은 당기는 법이다. 격이 떨어져서 외로워 보이는 게 좋은 것이다. --- p.81


나는 그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결혼할까? 같은. 농담이라도 좋으니까 그런 프러포즈를.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그는 말하지 않는다. --- p.85


“결혼이란 게 그런 걸까? 뭐야, 쓸쓸하네.”

“고양이 안고 자는 것보다 기쁜데.” --- p.85


미카코는 엄마야 어떻든 사랑과 결혼이라는 자기만의 아름다운 꿈을 이어가고 싶다. 사랑, 결혼, 임신, 출산이라는 여자의 일생의 아름다운 불꽃을 연타로 쏘아올려 꽃피우고 싶다. --- p.103


“혼자 있으면 자주 혼잣말을 하게 되는 것 같아요. 혼자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 p.117


하나같이 피부가 뽀얗고 활기차 보이고 식욕이 솟게 하는 얼굴을 가진 남자들이었다. 나는 식욕도 남자를 봤을 때 더 생기는 거구나 하고 새삼 생각했다. --- p.144


노처녀란, 그녀가 갖고 있는 물건이나 몸짓, 말투에 오래 익숙해지다보면 그런 것들로도 그녀의 독신생활이 얼마나 됐는지를 헤아리게 되는, 그런 데가 있다. --- p.147


오래 만나왔다는 점이 수상쩍은 것이다. 너무 오래 만나와서, ‘그래, 가는 거야!’ 하는 데가 없어져버렸다. 나는 로맨티스트라 결혼이라는 건 ‘그래, 가는 거야!’ 하고 점프하는 것 같은 맛이 없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 p.198


남녀 사이란 어느 쪽이 됐든 한쪽이 억지로라도 끈을 꽉 묶어놓고 있지 않으면 자연히 풀려버리는 허망한 면이 있다. --- p.199


“남자와 여자는 나이가 중요한 게 아니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사이라는 게 있어. 그런 좋은 사이가 되면 나이도 주름도 어디론가 날아가버린다고.” --- p.228


“나는 어느 장소에서 누굴 기다립네 하는 얼굴로 여자를 기다린 적은 한 번도 없어. 그런 점点의 만남은 바보나 하는 짓이야. 난 선線으로 만난다니까.” --- p.236


[YES24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