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필, 녹색 머리띠, 체크무늬 자켓, 저금통, 일기장 …
'엄마가 사준 연필', '10살 생일선물로 받은 녹색 머리띠', '언니에게 물려받은 체크무늬 자켓', '스무살을 기록한 일기장' …
앞서 언급한 내 주변의 사물에는 각각의 사연이 있다. 그 사물이 내게 와서 쓰이다가 쓰이지 않게 돼서 어딘가에 보관돼 있는 지금까지. 수많은 사물이 내게 왔다가 사라졌고, 일부는 '보관'돼 있다. 지금 쓰이는 사물 중에서도 소중한 것도 있고, 있는 듯 없는 듯 어딘가에 '쌓여 있는' 것들도 있다. 너무 쉽게 왔다가 가버리는 것들(?)이 많다. 너무 많은 소비를 하는 탓이고, 그 소비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지 못하면서 살고 있다. 또 너무 흔해서 아까운 줄 모른다. (흥청망청 물건을 쓰고 있구나!) 그래서 '감정'이 담긴 사물이란, 사실 많지 않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어떤 사물이든지 내게 온 경위가 있고, 나를 떠난 경위가 있다. 아끼는 물건은 그 만한 이유가 있다. 소비에 관해서 말하려는 것은 아니었으나 '사물'에 대해 말하다보니 소비하는 생활에 대한 반성이 먼저라는 생각이 든다.
어려서 '껌 종이'(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를 수집한 적이 있었다. 우표나 동전, 엽서 등은 다른 사람들도 수집을 많이하는데 나는 왜 껌 종이를 모았던 것일까. 지금은 남아 있지 않지만, 껌 종이 자체에 집착했다기 보다 무언가를 모은다는 행위에 집착했던 모양이다. 껌 종이는 내게 위로도 되지 않았고 기쁨도 되지 않았다. 그저 새로운 껌 종이와 갯수가 늘어나는 것만이 즐거움이었다. 어른이 돼서도 가방이나 신발 등을 비롯해 그릇이라든지 화분이라든지 사진기라든지 특별히 물건도 모으지 않는다. 또 어떤 물건을 살 때 선호하는 브랜드도 없다. (안타깝게도 특별히 선호하는 취향이 없다고 하겠다.) 그러니 물건에는 집착하지 않는 편이라고 해야 맞다.
물질에 집착하지 않는다지만, 물질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당연하다. <사물의 심리학>은 사물과 사람과의 관계를 분석한 책이다. 사람과 사물과의 관계는 그 사물을 잃어버렸을 때의 감정으로 환원된다.
"물질의 가치는 슬픔의 깊이에 큰 역할을 하지 못한다. 잃어버린 집이나 자동차, 가구, 기타 물건들의 가격이 얼마였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얼마나 많은 노력과 에너지, 추억과 사랑이 그 안에 담겨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 소박한 오두막이 불에 탔어도 값비싼 빌라를 잃은 것 못지않게 슬프고 괴롭다. 미국 웨스트 버지니아 주의 홍수에서도 알 수 있듯 오히려 볼품없는 오두막이 비싼 집보다 더 큰 가치를 지닐 수도 있는 것이다." (28쪽)
너무나 당연한 말이다. '아끼는 물건'을 잃어버렸을 때의 상실감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분명한 슬픔으로 다가온다. 때로는 사람보다는 사물에게서 위안을 얻을 때도 있다. 그 사물에 켜켜이 쌓인 추억과 애정의 순간들이 떠오르면서. <사물의 심리학>은 사물이 인간성에 미치는 다양한 사례와 연구결과를 제시하고, 그것으로부터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고 봤다. 또 사물과 사람의 심리의 연관성을 근거로 물건에 대한 의존성, 집착 등을 심리적인 문제 해결로 풀어낼 수 있다고 봤다.
"여성들은 아끼는 물건을 관계 지향적인 안경을 쓰고 바라보았다. 반면 남성의 시각은 주로 활동성, 기능성, 자기 개성과 능력의 표현에 좌우되었다. 남성과 여성은 정말 다른 방식으로 소유물과 자신을 동일시한다. "(101쪽)
"사물의 중요성을 그 어떤 연령대보다 특히 유년기에서 두드러진다. 사물이 자아감과 자율성, 상상력과 사회관계의 발전을 촉진하기 때문이다. 장난감과 물건들은 아이들의 마음을 매혹하고 안정을 준다. 아이들은 물건을 통해 자신의 가능성과 재능을 탐색하고 문화를 익히며, 함께 나누고 갈등을 참아야 하는 사회적 필요성을 배운다."(69쪽)
"낮은 자존감과 명품 욕심의 상관관계도 학문적 연구를 통해 밝혀진 사실이다. 다양한 실험을 통해 학자들은 불안감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신분을 상징하는 물건에 더 많은 가치를 둔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따라서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물질주의적 성향을 차단하는 유익한 조치일 수 있다. 열등감이 사라지면 물질에 대한 의존도도 줄어들 것이다."(206쪽)
최근 경향신문 <심리톡톡-나와 만나는 시간> 강연을 들어보면, '자신을 아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자신을 알아야 자신의 심리 상태를 진단하고 그 심리적인 불안이나 갈등 요소의 원인도 알 수 있다. 또 한편 자신을 위로하고 자신을 보호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알 수 있다. 누군가를 공감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공감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물의 심리학>의 저자는 자기를 이해하는 데 있어 사물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것을 권한다.
이 많은 사례와 연구들을 제시하면서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사물이 곧 자아"라는 공식이다. 사물에는 사람의 정체성이나 그 사람에 관한 추억이나 역사가 내재해 있기 때문에 단순히 '물질'로서의 기능이 아니라 정신적인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물걸을 소유하느냐가 사람에 대한 이해를 높인다고 보고 있다. (물론, 나는 사물을 많이 소유하려고 하는 욕망과 또 자신이 가지고 싶지만 경제적인 이유로 가질 수 없는 물건들에 대한 욕망 등도 눈에 보이지 않는 그 사람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또, 내가 껌 종이를 모았던 것처럼 사람이 가진 사물이 그 사람의 정체성과 아무런 인과관계가 없는 경우도 있더라.)
이 책이 번역돼 나온 것은 지난해 10월. 사례와 연구 중심으로 소개돼 있어 읽는 데 지루하지 않다. 좀 뻔한 이야기같다는 생각도 들지만.
저자 아네테 쉐퍼는 1966년생으로 15년 이상 프리랜서 기자로 일하며 심리학과 경제학 분야의 글을 쓰고 있으며『창조적 파괴의 힘』이라는 제목으로 경제학자 슘페터의 전기를 출간하기도 했다. 사람과 심리학에 대한 관심은 그녀의 글 속에서 폭넓게 자리하고 있다. 그녀의 글은 《오늘날의 심리학》, 《뇌와 정신》, 《비르트샤프츠보헤》, 《파이낸셜 타임즈 독일》 등에 실렸으며 심리학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도왔다는 평을 들었다. 이 책을 집필하면서 물건과의 관계는 저 깊은 곳에 숨어 있는 개인적인 질문들을 건드린다는 사실을 발견하였고 이를 밝혀내는 흥미로운 경험을 했다. (출처: 인터넷 교보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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