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으로 말하면 옅은 회색, 아니 투명한 회색. 날씨로 말하면 안개가 끼었는데, 진눈깨비가 끊임없이 내리는 날. 사람으로 말하면, 염세적이고 허무주의에 갇힌 것 같지만 멋진 관계를 꿈꾸는 소녀같은 이. 이장욱의 장편소설 <천국보다 낯선>을 읽으며 이렇게 '시어(詩語)'같은 문장들이 맴돌았다.
이 소설은 영화 <천국보다 낯선>을 모티브로 삼았다. (영화를 못봐서 마저 의미가 다 와닿지 않은 건 아닐지). 이 소설의 중심은 대학 동창인 A의 부음을 듣고 K시의 장례식장으로 향하는 3명(혹은 4명)의 인물이 각각 1인칭의 시점으로 삶과 인간과 또 그들과의 관계에 대해 '털어놓는 서술'이다. 내가 보는 것과 네가 보는 것이 다르고, 우리 관계도 입장에 따라 다르게 정의되는 것. ‘정’, ‘김’, ‘최’란 각각의 화자들이 기억하는 A의 모습은 모두 다르듯이. 요시다 슈이치의 <퍼레이드>란 소설을 읽고 비슷한 느낌을 받은 적이 있다. 시간과 장소와 사람이 만들어내는 '각기 다른 것들'의 모습을 말이다.
어쩜, 표지도 이렇게 아름답게 만들었을까.
이 소설 속에는 A가 만든 영화 한 편이 등장한다. A를 포함한 화자들은 대학시절 함께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며, 영화를 만들며 보냈다. A가 만든 영화는 소설에서 매우 중요한 것처럼 보였는데, A를 다르게 기억하듯 영화를 보는 사람들의 느낌도 저마다 달랐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엔 카메라가 등장하면서 마치 이들이 K시로 가는 그 길이 영화 속에 들어있는 것처럼 장치를 해뒀다. 절대적인 시간의 개념을 깨뜨린 것이다. 또 이들이 K시로 가는 동안 각자에게 죽은 A에게서 문자가 온다. 마치 이들이 A가 만든 영화를 보기 위해 앞서 만났던 날과 같은 느낌으로. 그들의 현재가 과거인지, 미래에 일어난 일을 미리 알게 된 것인지 경계가 무너진다. 영화 <천국보다 낯선>은 그래서 이 소설의 모티브가 되었나. 아주 낯선 느낌을 말하기 위해. 우리는 삶의 주체같지만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이방인'이 될 수 있다는 것. 그 이방인이라 함은 자신도 모르게 스스로가 낯설어지는 순간임을. 다소 난해한 것 같지만,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을 차분하게 미려한 문장으로 뽑아낸 건 작가의 몫이었다. 그래서 내게도 하나의 문장이 남았다.
'김'이 A에 대해 회고했다.
"그녀의 말은 옳았다. 우리는 두 번 다시 같은 강물에 손을 담글 수 없다. 우리는 두 번 다시 같은 길을 지날 수 없다. 나는 어제의 너를 다시 만날 수 없다. 우리는 영원히 우리를 스쳐 간다. 실은 그렇게 스쳐 가는 나 자신조차도 다시는 만날 수 없겠지만."
새해가 되면서, 올해는 어떤 일들을 할 것인지 혹은 어떤 자세로 살 것인지 생각하게 되는 요즘이다. 성급한 계획보다 차분하게 하루 하루를 알차게 채워나갔으면 하는 바람. 그게 타인이든 나 자신에 관한 것이든. 이 모든 순간은 다시 만날 수 없으므로.
영화 <천국보다 낯선>에 대해 살짝 검색을 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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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보다 낯선Stranger Than Paradise , 1984
짐 자무시(감독)리처드 에드슨(에디), 존 루리(윌리), 에스터 벌린트(에바)
'1년 후(One Year Later)'. 1년 후 윌리는 친구 에디와 함께 에바를 만나러 클리블랜드로 무작정 떠난다. 괴짜 로티 아주머니와 함께 사는 에바는 핫도그 가게 점원으로 무료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 세 사람은 함께 플로리다로 떠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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