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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음알음

“사장이 나빴어”

한 해를 마무리하는 겸 다이어리들이 쌓인 박스를 열었다가 어느 해 다이어리에서 알베르 카뮈의 단편 <벙어리들>에 대한 메모를 찾았다. 이 메모는 아마 대학에 다닐 때쯤 적어놓은 것 같다. 아르바이트를 하긴 했지만 학생 신분이었기 때문에 '벙어리'라는 단어에서 오는 맥락을 그때는 다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카뮈는 최저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임금을 올려달라며 파업을 하는 노동자들을 벙어리로 묘사하고, 그들의 파업을 '아우성'이라고 표현했다. 말하지 못하는 이들의 아우성이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을 것이란 역설이었다. 그리고 그들을 무력하게 만든 것은 그들의 '빠른 포기'가 아니라, "(그마나 적은) 임금도 주지 않겠다"고 더 강하게 나오는 사장의 엄포와 가족의 그늘진 얼굴이었다. 주인공은 집에 돌아와서야 "사장이 나빴어"라고 말한다. '벙어리'란 단어로 번역이 돼서 비하하는 듯한 느낌이 드는지도 모르겠으나 말을 하지 못하는 무력한 노동자들이라기보다는 이 노동자들을 무력하게 만드는 현실에 대해 역설적으로 '말을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오늘 아침 이런 기사가 있었다.


월마트 시급이 부른 미국 최저임금 논쟁


연말을 향해 가며 미국의 정치적 이슈들이 하나둘 잠복하고 있지만 최저임금을 둘러싼 경제민주화 논쟁은 오히려 활기를 띠고 있다. 현재 연방 차원의 최저임금은 시간당 7.25달러(약 7640원)다. 이는 가이드라인일 뿐 대부분의 주와 시·군 지자체들이 각자 최저임금을 정하고 있다. 연방의회 차원에서 민주당이 최저임금을 10.10달러로 올리려는 법안을 발의했지만 공화당 소속 존 베이너 하원의장이 반대해 논의조차 이뤄지지 않는 상황에서 지자체 의회들이 잇달아 최저임금 인상법안을 가결했다.

지난 4일 수도 워싱턴에서 대형할인점 체인인 월마트가 처음으로 문을 열며 최저임금 이슈가 다시 제기되고 있다. 워싱턴 시의회는 지난 7월 월마트 같은 대형할인점은 시급 12.50달러를 지급해야 한다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워싱턴의 최저임금은 8.25달러다. 월마트는 그럴 경우 워싱턴에 입점할 수 없다며 버텼고, 월마트 유치를 추진한 빈센트 그레이 워싱턴 시장이 거부권을 행사해 법안이 무산됐다. 하지만 월마트 개업을 하루 앞둔 지난 3일 워싱턴 시의회는 워싱턴의 최저임금을 2016년까지 11.50달러로 올리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재선 도전을 선언한 그레이 시장이 이 법안마저 거부할지는 미지수다. 

워싱턴 인근 지자체인 메릴랜드주의 몽고메리 카운티, 프린스조지 카운티는 최근 사업체들이 다른 지역으로 옮기겠다는 압박에도 연대해 7.25달러인 최저임금을 향후 4년간 11.50달러로 올리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워싱턴주 시애틀-타코마 공항 지역에서는 주민투표로 최저임금을 주법에 정해진 9.19달러에서 15달러로 올리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지난 4일 자신의 공약을 만드는 데 참여한 미국진보센터(CAP)를 방문한 자리에서 “빈부격차 심화가 미국의 건국이념을 위협하고 있다”며 최저임금 인상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다. 

올해 뉴욕, 시카고 등 대도시에서는 패스트푸드점 노동자들이 행동의 날을 정해 ‘최저임금 7.25달러’를 두 배로 올려야 한다는 시위가 많이 벌어졌다. 워싱턴포스트는 이 같은 운동은 상·하원 연방의회 중간선거가 있는 내년 11월에 다가갈수록 더 많이 제기될 것으로 예상했다. 민주당은 노동자 정당을 자부하며 최저임금 인상에 적극적인 반면, 대기업 등 상공인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공화당은 최저임금 인상이 오히려 일자리를 빼앗을 것이라는 논리로 반대하고 있다. 워싱턴 | 손제민 특파원 jeje17@kyunghyang.com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말이다. "빈부격차 심화가 미국의 건국이념을 위협하고 있다"며 "최저임금 인상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누군가 이렇게 말을 해주어야 한다. 이것을 정책으로 옮기고 실행하는 것은 국회의원이고 정부 관료들이겠지만, 이런 목소리를 누군가는 내주어야 한다. 한국의 최저임금은 4860원. 내년엔 5210원. 여전히 그러나 일부는 이 최저임금도 못받는 경우도 있다.


지난달 초 이런 기사가 나왔다. 잡코리아가 운영하는 아르바이트 구인구직 포탈 알바몬이 최근 OECD 22개국의 시간당 최저임금과 빅맥지수를 비교한 것이다. 한국의 시간당 최저임금은 3.98달러로 OECD 22개국 중 14위를 기록했다. 



김한솔 기자 hansol@kyunghyang.com

올해 시간당 4860원인 한국의 최저임금은 평균임금 대비 37~38% 수준이다. 한국이 소속돼 있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권고하는 최저임금이 평균임금 대비 50%인 것에 비해 크게 낮은 수준이다.

2011년 통계를 보면 한국의 최저임금은 평균임금 대비 34%로 OECD 회원국 26개국 중 20위에 머물고 있다. 김종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연구실장은 “현재 한국의 최저임금은 국제 기준으로 볼 때 크게 미흡하다”며 “한국과 경제규모와 구매력지수가 비슷한 그리스, 헝가리, 체코, 스페인 등과 비교해 봤을 때도 낮은 수준”이라고 말했다.

김 실장은 “최저임금이 높아지면 자영업자들의 부담이 늘어난다고는 하지만 사실 최저임금이 적용되는 아르바이트생들을 고용하는 자영업은 대기업의 프랜차이즈 피자, 치킨집이나 편의점 등이 많다”며 “이들에게는 최저임금 인상보다 대기업이 가져가는 수수료 등이 더 부담이 크다”고 말했다. 또 대기업 체인점 등이 아닌 동네 작은 슈퍼 등 영세자영업자들은 아르바이트생들을 고용하는 경우가 많지 않아 최저임금 인상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김 실장은 덧붙였다.

한신대 박하순 강사는 최저임금 수준을 결정할 때 최저임금을 받고 일하는 노동자들의 환경도 고려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박 강사는 “최저임금을 받고 일하는 이들은 중산층에 훨씬 못 미치고, 여성이나 중고령인 경우가 많다”며 “재산상황이나 연령, 불안한 고용형태 등을 고려했을 때 현재 최저임금 수준은 턱없이 낮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엔 노동자들의 임금을 올려주고, 노동자들 간의 소득격차를 줄여 전체 경기를 활성화하는 ‘임금주도 성장’이 각광받고 있다”며 “최저임금이 올라가지 않으면 장기적으로 봤을 때 소비가 줄어 경제 전체가 둔화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김 실장은 “사실상 정부가 추천하는 최저임금위원회의 공익위원 9명의 지명권을 정치권과 시민단체가 나눠갖게 해 공정성을 확보하는 것도 적절한 최저임금을 설정하는 데 중요한 요소가 된다”고 말했다.


무릇 어제 발견한 메모와 오늘 기사(월마트 시급 논쟁)가 소설과 현실이라는 게 다를 뿐이다. 사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게 하는 것도 문제지만, 현실에선 이런 목소리를 아무리 내도 들으려 하지 않는 당국과 마주하는 게 조금 더 힘들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