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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류 예찬

어렸을 때 우리집에는 없는 과일 나무들이 동네 이웃집 담벼락에 걸치고 있는 것을 보고, 심한 충동을 느끼곤 했었다. 늦봄 초여름에는 앵두가, 늦여름 초가을에는 무화가가, 그리고 가을이 깊어지는 이 맘때는 모과와 석류가 마치 꽃처럼 곳곳에 피었다. '시골 인심'이란 걸 나는 그때도 알고 있었는지, 종종 그 나무 열매들을 향해 손을 뻗곤 했다.(요즘은 이런 일로 경찰서도 가더라는....) 앵두와 무화과는 비교적 맛을 보기에 쉬웠다. 흐드러진 나뭇가지가 담벼락을 넘어 아래로 뻗고 있었기에. 반면 모과와 석류는 대개는 키가 큰 나무에 매달려 있었다. 모과와 석류는 열매도 그 크기가 내 손바닥보다도 컸기 때문에 남의 집 담벼락을 넘어 남의 과일을 따먹는다는 죄책감이 더 크게 발동해 쉽사리 만져보지 못했다. 그래서 모과나 석류는 왠지 거리감이 느껴졌다.


언젠가 '석류 음료'가 인기를 끌었던 적도 있다. '석류'를 쉽게 '마시게 됐으니' 이제 더이상 먼 거리에 있는 과일은 아니었다. 대중적인 과일이 된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실제로 석류를 보는 일은 거의 사라졌다. 불과 10여년이 흘렀을 뿐인데 어려서 살던 동네에 가보면 요즘은 과일 나무을 끼고 있는 집은 거의 없었다. 모과 나무도 마찬가지. (가장 좋아하는 과일은 단감, 바나나 이렇게 비교적 흔한 과일이니 찾아서 먹었지만, 길가를 지나다 마주쳤던 석류는 까맣게 잊어버렸단 게 맞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얼마 전 시골에 살고 있는 '우리 오빠'가 동생들이 살고 있는 이곳(서울 및 인천)에 놀러 왔다. 그리고 제철을 맞은 석류를 사주는 게 아닌가. 농산물시장에선 개당 2500원, 일반 슈퍼마켓에선 개당 4000원. (역시, 비싼 과일!) 실제로 본 게 얼마만인가. 구하기 어려운 것도 아니었는데, 이렇게 실제로 보니 마냥 반가웠다. 크기는 역시 어른이 된 내 손바닥보다도 컸다.



 

(속 알맹이가 새빨갛게 익었다. 과즙(?)은 요즘 대세라는 핫핑크!)


알알이 박힌 알맹이를 꺼내서 맛을 보니 새콤달콤. 꽤 익은 상태였다. 옆에서 가족 중 누군가는 "석류는 술을 담가야 제 맛"이라고 했다. 어떻게 먹든, 석류가 이런 맛이었다니 새삼 내 혀가 놀랐다는 것. 그래서 뜬금없이 '석류'에 대해서 추억도 떠올리고, 석류에 대해서 몇 가지 검색도 해봤다. 


 <석류>라는 시가 있다. 물론 이 시를 외우지는 못하고 어디선가 한 번 들었는지 읽었는지, 뇌리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그래서 '검색'. (어떤 정보를 인터넷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은 참 안타까운 일이다.)


폴 발레리의 시 <석류>


알맹이들의 과잉에 못 이겨

방긋 벌어진 단단한 석류들아.

숱한 발견으로 파열한

지상(地上)의 이마를 보는 듯하다!


너희들이 감내해 온 나날의 태양이,

오 반쯤 입 벌린 석류들아.

오만으로 시달림받는 너희들로 하여금

홍옥의 칸막이를 찢게 했을지라도.


비록 말라빠진 황금의 껍질이 

어떤 힘의 요구에 따라

즙 든 붉은 보석들로 터진다 해도,


이 빛나는 파열은

내 옛날의 영혼으로 하여금

자신의 비밀스런 구조를 꿈에 보게 한다.


<해변의 묘지>, 김현 옮김, 민음사, 1973



시조시인 조운의 <석류>


투박한 나의 얼굴

두툼한 나의 입술


알알이 붉은 뜻을

내가 어이 이르리까


보소라

임아 보소라

빠개 젖힌 이 가슴.




석류는 그 자태가 인간 내면의 의식세계를 탐구하고 싶도록 만드는 그 자체였던 것은 아닐까. 단단한 듯 유연한 황금빛 껍질 속에 꽉 들어찬 알맹이는 그 나름의 투명막 속에서 영글어간다. 톡, 하고 터지는 순간 가장 깊은 곳의 씨앗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다. 석류는 사실 꽃처럼 피어 점점 제 모습을 채워나간다. 그리고 모든 것이 완성되어가는 듯한 이 늦가을에 온전한 모습을 갖추는 게 아닌가.



강연균 화백 작품, 1991년


출처 : http://www.kwangju.co.kr/read.php3?aid=1382540400509156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