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법무부는 지난 8월24일 중앙정보국(CIA)이 9·11 이후 대 테러전 수행 과정에 운영한 비밀 수감시설에서 자행된 인권유린 행위들에 대한 자체 감찰 보고서를 공개했다.
이 보고서는 조시 W 부시 행정부 시절 CIA가 테러 용의자에 대해 물고문 등을 자행한 내용은 물론 이러한 신문이 의사와 심리학자들이 참여한 가운데 당시 CIA 지도부와 법무부에 의해 조직적으로 관리됐다는 의혹을 망라하고 있다. 에릭 홀더 법무장관은 보고서 공개 직후 존 더럼 연방검사를 특별검사로 임명, 신문 과정에 대한 특별 수사를 지시했다.
이에 따라 고문에 가담한 CIA 직원 등에 대한 기소 논란이 불거지고 있다. 버락 오바마 미국 행정부가 본격적인 ‘과거사 청산’에 나설 것인지 귀추가 주목된다.
미 NBC 방송은 미 법무부가 공개한 보고서를 인용, CIA가 9·11 테러 용의자인 할리드 셰이크 모하메드를 신문하는 과정에서 한 요원이 미국 본토에 대한 또 다른 테러공격이 발생할 경우 “너의 아이들을 죽이겠다”는 말을 했다고 보도했다.
또 다른 신문요원은 알카에다 소속 테러 용의자에게 “네 어머니를 여기 불러올 수 있다”, “네 가족도 데려올 수 있다”며 가족 구성원 가운데 여자를 성폭행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갖도록 한 것으로 확인됐다.
CIA 감찰 보고서, 어떤 내용이 담겼나
보고서에 따르면 CIA 신문요원들은 자백을 끌어내기 위해 총과 전기드릴을 위협 도구로 사용하고 다른 용의자를 처형하는 장면을 암시하기 위해 총성이 울리는 상황을 연출하는 등 심리적 위협을 가했다. 이는 미국의 고문금지법에 저촉되는 것이다.
물론 신문요원들은 이러한 의혹을 모두 부인했다. 그러면서도 가혹한 신문기법을 통해 파키스탄 주재 미국 대사관에 대한 알카에다의 테러 음모를 비롯해 열차 탈선, 주유소 폭발, 교량 파괴 등과 같은 테러 기도를 사전에 막을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뉴욕타임스는 8월26일 CIA의 비밀 신문 프로그램이 치밀한 프로그램에 의해 운영됐다고 전했다. 예를 들어 “17와트 형광등 2개가 24시간 감방을 비춘다”, “백색 소음(화이트 노이즈)을 지속하되 79데시벨을 넘으면 안 된다”, “수감자는 물에 처넣을 수 있지만 한 번에 20분만 허용된다” 등 구체적인 규율을 정해 놓은 것이다.
물고문을 행사할 때 대상 수감자에 대한 심리적 기록을 남겨 법률고문 등이 이를 검토한 것으로 드러났다. 당시 워싱턴의 지도부와 CIA 지도부가 24시간 모니터링한 내용을 검토, 신문 프로그램을 지시·관리한 것으로 드러났다. 고문행위가 신문요원 개인에 의해 돌발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따라서 법무부가 가혹행위 고문자들을 기소할 경우 당시 지도부까지 대상이 확대될 가능성이 있다.
CIA 보고서 공개로 정치권 후폭풍
오바마 행정부는 이번 조사와 관련, 과거 부시 행정부의 신문 관련자들에 대한 처벌을 전제로 한 것은 아니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특별검사의 수사가 진행됨에 따라 보고서 내용상 고문금지법을 위반한 신문요원들에 대한 기소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 때문에 정치권에선 특검 조사를 두고 논쟁이 거세지고 있다. 공화당 의원들은 법무부의 조치가 정보요원들의 활동을 위축시킬 수 있다며 반발하고 나섰지만 민주당 의원들은 오히려 CIA의 테러용의자 신문에 대해 조사할 독립적이고 초당적인 위원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오른쪽)이 지난 2005년 3월5일 워싱턴의 중앙정보국(CIA) 본부에서 포터 고스 당시 CIA 국장으로부터 보고를 받은 후 함께 걸어나오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특검 수사에 대한 비판의 기수로 나선 사람은 딕 체니 전 부통령이다. 체니는 8월30일 폭스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법무부의 특검 임명은 ‘노골적인 정치행위’이며 이는 미국의 안보를 위협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지난해 대선 당시 공화당 후보였던 존 매케인 상원의원은 CBS 방송에 출연, 오바마 행정부가 과거 CIA 요원들이 벌인 일에 대해 수사하려는 것은 ‘심각한 실수’라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 민주당의 존 케리 상원의원은 “체니 전 부통령은 지난 수년 동안 의회와의 정보 공유를 규정한 헌법 조항을 무시했으며, 법 조항도 경시했기 때문에 나는 그가 이 문제에 대해 화내는 것이 전혀 놀랍지 않다”고 대응했다.
이번 보고서 공개로 CIA는 곤경에 빠졌다. 로이터 통신은 이번 특검 조사로 CIA가 정치적 시련을 겪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에 앞서 백악관은 주요 테러 용의자들에 대한 신문을 전담하는 특별팀을 창설하고 이 기구가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NSC)의 직접 관리·감독을 받도록 했다. 테러 용의자에 대한 신문을 CIA 관할에서 백악관 관할로 옮긴 것이다.
논란의 중심, CIA
일각에서는 특검 조사가 CIA만 이중 처벌하고 지시를 내린 법무부는 책임에서 벗어나려는 처사라는 비판도 나온다. 홀더 장관은 고문을 승인한 부시 행정부 고위 관료들에 대해서는 직접 조사하지 않을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또 CIA 보고서 공개에 대해선 적극적이면서도 법무부 책임에 대한 내부 조사 결과는 공개하지 않고 있다.
이에 앞서 파네타 CIA 국장은 법무부의 조사에 반발, 사퇴 의사를 밝히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신문 프로그램이 부시 행정부 때 운용된 것이었음에도 파네타 국장은 조직 내 사기 저하를 염려해 CIA를 감싸는 태도를 보여왔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CIA는 8월2일 뉴욕 연방법원에 제출한 진술서에서 수백쪽에 이르는 구금 및 신문 프로그램 관련 기밀문서를 공개할 수 없다고 밝혔다. 이 문서들이 공개될 경우 비밀로 분류된 정보 관련 소식통과 활동이 위태롭게 된다는 이유에서다.
여기에는 부시 전 대통령이 2001년 9월 CIA에 테러 용의자들을 몰래 붙잡도록 승인한 것과 관련된 문서도 포함돼 있다. 또 CIA 비밀감옥 요원들과 워싱턴의 상관들 간에 주고받은 전문과 구금 프로그램의 적법성에 관한 CIA 법률고문들의 평가도 들어있다.
CIA의 이런 입장은 법무부의 감찰 보고서 공개 1주일 만에 나온 것이다. 이 때문에 CIA가 특검 조사에 정면으로 맞서면서 오바마 행정부가 약속한 투명성을 훼손하고 있다는 비판이 일고 있다.
<국제부·김향미 기자 sokh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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