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시민들은 수도 카이로의 ‘타흐리르(해방) 광장’에서 역사를 만들었다. 30년간 집권해온 호스니 무바라크 전 대통령이 지난 1월 11일 사퇴하면서 카이로에 해방의 봄을 불러들인 것이다. 현재 군 최고위원회가 국정을 운영하고 있으며 6개월 내에 선거를 치러 정권을 민간에 이양한다고 밝힌 상태다.
이제 이집트는 새로운 역사를 쓰기 위한 시험대에 올랐다고 할 수 있다. 최대 야권조직인 무슬림형제단은 그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하게 될까.
무슬림형제단은 지난 1월 15일 자체 웹사이트에 올린 성명에서 “정당을 세울 것”이라면서 이집트 정계에서 합법적인 정치활동에 나설 것임을 시사했다.
이슬람주의를 표방하는 무슬림형제단은 1954년부터 반세기가 넘도록 이집트 정권에 의해 ‘불법단체’로 규정돼 활동이 금지돼 왔다. 하지만 이집트 민주화 시위 과정에서 반정부 시위대에 힘을 보태고, 지난 6일 오마르 술레이만 부통령이 마련한 야권 단체들과의 협상에 초청되면서 합법적인 활동을 사실상 보장받았다.
오마르 술레이만 이집트 부통령(가운데)과 무슬림형제단 등 야권이
1월 6일 카이로에서 정치개혁안을 논의하고 있다. /신화
57년 만에 불법단체 딱지 떼다
무슬림형제단 내 젊은층 500여명을 이끌고 있는 칼리드 알 자파라니는 청년층으로 이뤄진 ‘시민 정당’을 세울 것이며, 당명은 터키 집권당 이름 딴 ‘이슬람정의개발당’으로 할 것이라고 밝혔다고 현지 언론 알 마스리알요움이 17일 전했다.
신문에 따르면 집권당 국민민주당(NDP)도 청년층을 내세워 새 정당 ‘이집트청년당’을 창당할 준비를 하는 등 최소 13개의 그룹이 창당을 준비하고 있다. 향후 6개월 안에 치러질 총선과 대선을 위해 각 세력들의 움직임이 본격화하고 있는 것이다.
무슬림형제단은 지난 9일 기자회견을 열고 “무슬림형제단은 의회에서 다수 의석을 추구하지도, 대통령 후보를 내지도 않을 것”이라며 세속적 권력을 잡으려 하지 않을 것임을 밝혔다. 이는 무슬림형제단의 부상을 꺼려하는 미국 등 서방을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이날 무슬림형제단의 집행위원 에삼 엘 에리안은 “무슬림형제단을 두려워하는 이유가 무엇인가”라고 반문하며 “이슬람 원리주의 확산을 우려하는 것은 시오니스트(유대 민족주의)들의 입장에서만 보는 근거 없는 생각”이라고 맞섰다.
무슬림형제단의 모하메드 알 벨타기는 16일 미국 USA투데이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우리는 타흐리르 광장에 모였던 사람들의 요구가 충족된 정부가 들어서길 원한다”면서 “이슬람 율법은 사람들의 요구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1954년부터 불법단체로 규정돼 활동이 금지됐던 무슬림형제단은 2005년 총선에서 소속 회원을 무소속으로 출마시켜 전체 하원 의석의 20%를 차지하는 성과를 거뒀다. 이후 무바라크 정권을 긴장시키는 최대 야권으로 부상했으나 지난해 11월에 치러진 총선에서는 정권의 탄압과 조직적인 선거부정 탓에 의석 대부분을 상실했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이번 민주화 시위 과정에서 무슬림형제단이 불법단체임에도 정부와의 대화 주체로 나설 수 있었던 것을 ‘역사적인 전환’으로 평가했다. 또한 신문은 “무슬림형제단은 향후 권력 공백을 메울 수 있는, 전 세계가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이 됐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카이로 아메리칸대학의 칼레드 파흐미 역사학부 학장은 “무슬림형제단은 잘 조직돼 있지만 영향력의 대부분은 과장돼 있다”고 말했다. 무슬림형제단은 이집트에서만 약 100만명의 회원을 두고 있다.
미국이나 유럽연합(EU) 등은 이슬람 근본주의 성향을 가진 무슬림형제단의 정치 참여를 우려하고 있다. 특히 이란과 유사한 이슬람 신정체제가 들어설 경우 북아프리카 및 중동에서 서방의 영향력은 더 줄어들고, 이스라엘과 이집트의 평화협정에도 금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무슬림형제단이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의 무장정파 하마스를 지지하고 있는 것도 고운 시선으로 바라볼 수 없는 이유다.
미국 16개 정보기관을 총괄하는 제임스 클래퍼 국가정보국(DNI) 국장은 16일 상원 정보위원회 청문회에 출석해 “조직 내부의 다양한 의견이 혼재하면서 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다”면서도 특히 이스라엘과 체결한 1979년 평화협정에 대한 입장은 우호적이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앞서 미국 하원의 피터 킹 국토안보위원장(공화·뉴욕)은 지난 12일 “선거를 통해 새롭게 들어설 이집트 정부에 무슬림형제단의 참여를 배제하도록 미국 행정부가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에드워드 맥밀란 스캇 유럽의회 부의장은 13일 이집트를 방문해 “이집트는 다른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민주주의를 누릴 수 있는 온건 국가이며 그 안에서 종교도 역할을 할 수 있다”며 무슬림형제단의 정치참여를 크게 우려하지 않는다는 뜻을 내비쳤다.
새로운 정국에 어떤 영향 미칠까
무슬림형제단이 대선 출마 후보를 내지 않겠다고 밝혔지만 그럼에도 우려가 가시지 않는 것은 무슬림형제단이라는 조직이 하나의 통일된 소리를 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무슬림형제단 내에는 젊은층과 나이든 지도부 간 세력이 나눠져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무바라크가 퇴진할 때까지 타흐리르 광장에서 반정부 시위를 벌인 쪽은 젊은층. 그러나 지도부는 반서방 성향의 보수파 집단이라고 미국 월스트리트저널이 전했다.
신문은 지난 15일 무슬림형제단의 양축의 대표 인물로 최근 반정부 시위를 주도한 모아즈 압델 카림(29)과 기존 무슬림형제단 지도자로 강경보수파의 핵심인 모하메드 바디에(66)를 각각 인터뷰했다.
카림이 밝힌 여성인권이나 종교자유, 정치적 다원주의에 대한 견해는 서방의 민주주의 가치와 부합한다. 그는 지금 무바라크 퇴진 이후 이집트에서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한 투쟁에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이집트 정국의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은 단연 군부다. 카림 등 젊은 행동가들은 14일 기자회견을 열어 이집트의 민주정권 수립절차가 진행되어야 하며 이에 대한 군부의 협조도 필요하다고 밝혔다. 반대세력까지 광범위하게 포함하는 통합된 정부를 수립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반면 바디에는 유대인을 자신들의 최초, 최고의 적으로 규정하면서 이들에 대한 성전의 기치를 유지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지난해 9월 무슬림형제단의 웹사이트에 미국을 가리켜 “도덕과 인간의 가치를 갖고 있지 못한 나라는 인류를 이끌 수 없다”며 “미국의 오만과 횡포에 대한 해결책은 이에 맞서는 것뿐”이라고 주장했다.
이집트 연구 전문가인 조시 스태처 켄트 주립대 교수는 “무슬림형제단의 전체 입장이 명쾌하게 정리될 것으로 기대할 수 없다”고 밝혔다. 현재로서는 무슬림형제단에 대해 그 이상의 대답을 들을 수 없다는 말이다. 클래그 국장도 “무슬림형제단을 한 그룹으로 특정짓는 것은 매우 어렵다”면서 “이집트에 대한 우리의 관찰을 더욱 고도화해야 할 것”이라고만 답했다.
<김향미 경향신문 국제부 기자 sokh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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