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이라는 학문을 처음 접했을 때(일반 교양 수준의 심리학), 나는 심리학이 불편했었다. 이 심리학의 이론들을 적용해서 '나의 행동을 무엇무엇이라고 간주'하는 것이 싫었다. 내 행동을 심리학 이론대로 해석해서, 저 사람은 지금 내 심리를 이렇게 읽고 있겠구나 하는 것이 불쾌했던 것이다. 마치 심리학이라는 안경을 쓰고 나의 마음을 꿰뚫어보고 있다거나, 그것이 정답이 아닐 수도 있는데 오해하고 있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지금 내 행동이 모두 내 어린시절의 환경과 관련이 있다거나 내 꿈이 모두 무의식에 켜켜이 쌓여 있던 것들의 발로라고 생각하는 것도 억지스럽게 느껴졌다. 어쩌면 나의 어떤 행동들이 어린시절의 결핍에서 나온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기 싫었다. 좀 편협하긴 했지만 '많이 가진 것이 결핍보다는 우위에 있다'고 생각했던 시절이니까.
그러다 이것은 그저 하나의 관점이고 사람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하나의 툴이다, 그리고 그것이 매우 유효할 수도 있다고 인정하게 됐다. (아직도 심리학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고 생각하고, 오류를 범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사람들이 왜 심리학을 배우고, 심리관련 서적을 읽는지, 그리고 '힐링'이라는 단어가 유행처럼 퍼진 것에 대해서 '그것이 중요한 것'이라고 인정하게 됐다. 인간과 세계를 '이해'하는 것이 학문이라면, 심리학은 둘다를 하는 공부라고 생각하게 됐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심리학을 잘 몰랐다. 여전히 잘 모른다. 깊게 공부해본 적도 없고, 유행하는 서적들을 모두 읽은 것도 아니다. 힐링카페에 가본 적도 없고, 사주카페도 안 간다. 그러니 단지 싫어했던 것이다. 심리학을 싫어하는 이런 감정 상태를 심리학에선 뭐라고 진단할지 궁금하다. 아마 '자존심을 건드렸다거나' '자신을 드러내기 싫어하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정신과'에 오기 싫어하는 사람들의 심리처럼.
여하튼 이렇게 말을 꺼낸 것은 <도시 심리학>(해냄출판사, 2009)이란 책을 읽으면서 심리학이 가깝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시골에서 자라서 대학 입학 이후 시작된 '도시에서의 삶'은 종종 객관화된 대상이 되었다. "화려한 도시가 시골을 소외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 도시가 자연에서 소외되었다"고 믿었으니까. 가까이 스치는 사람은 더 많고, 길가다 마주치는 사람의 밀도도 더 높은데 도시생활은 '더 외롭다'. 즐거움의 대상도 많지만, 막상 가고싶은 장소가 없다. '상대적인 판단'이긴 하지만 도시의 삶은 그렇게 사람들의 마음을 다치게 하고 있다. 그런데 <도시 심리학>은 그렇게만 보지는 않는다. 왜 사람들이 도시에서의 삶에서 벗어날 수 없는지, 또는 도시에서의 사람들의 삶을 그것 자체로 긍정한다. 그리고 이 책에도 많은 심리학 이론이 등장하지만, 과도하다거나 무리하다고 느껴지지는 않았다.
촌스럽긴 하지만 도시에 사는, 도시 문화를 향유하는 사람들을 '도시인'이라고 해보자. <도시 심리학>은 도시인은 왜 커피와 와인을 즐기고, 커피와 와인에서 개인적인 취향을 드러내려고 할까. 도시인은 왜 외모에 신경을 쓰고, 성형외과에 찾아가는 걸까. 도시인들은 왜 지름신에게 자신의 경제권을 넘기는가. 도시인들은 왜 첨단문명의 시대에도 점을 보러 가는가. 도시인들은 왜 개인정보에 민감하면서도 대리운전은 쉽게 이용할까. 등등, 일상에서 내가 하고 있고 내가 궁금해했던 행동들, 감정들, 현상들에 대해 심리학적으로 풀어주는 책이다. 하지현 교수의 개인적인 경험담도 거부감을 덜어내준다. 우리가 모두 그렇게 살고 있으니까.
예를 들어, 지름신이 내려 과도한 쇼핑을 했을 때 오는 쾌감과 죄책감. 저자는 지름신을 미워하지 않는다. 도시인에겐 그 만한 치유의 방법이 필요하니까. 그러니까 <도시 심리학>은 우리의 행동 패턴과 욕망을 분석하고 그것을 나무라지 않는다. 규범과 법에 어긋난 일에 대해 권장하진 않지만 그럴 일을 벌이는 동기가 무엇인지를 짚어준다. 그리고 시간을 갖는 것이다. 이 분석대로 라면 나의 심리 상태는 어떤 것이고, 내 행동이 이런 잘못된 심리에 뿌리를 두고 있구나, 내가 이해할 수 없었던 것들이 이런 이유였고 그래서 고치고 싶다면 해결 방법은 무엇인가 하고 가만가만 생각하다 보면, 굳이 (필자가) 나무라고 주장하지 않더라도 자연히 판단하게 될 것이다. 물론 그게 곧 치유로 이어질 수 없을 수도 있지만.
총4장으로 구성된 이 책에서 저자는 최소한의 소통으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끈을 이으려는 이들에게는 타자에 대한 거부감과 아울러 잊기 힘든 대양감이 도사리고 있음을 드러내고(1장 ), 커피전문점에서는 까다롭기 그지없어도 커피믹스에는 관대한 마음에서는 개성화와 사회화의 극단을 발견하며, 실연을 탓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는 행위는 불완전한 삶에 대한 자기애적 폭력임을 일깨운다(2장 ). ‘지름신 강림’을 빌미로 자기합리화에 익숙한 현대인들과 24시간 꺼지지 않는 편의점과 김밥집이 채워주는 만족이 팽배한 이곳의 삶을 추적할 뿐 아니라(3장 ), 놀이공간에서도 빠지지 않는 사회적 정체성, 학연·지연·혈연을 떼놓고는 견뎌내기 힘든 자기확신감 부족 증세를 면면이 파헤친다(4장 ).
(출판사 '해냄'의 서평 중에서)
모던보이로 알려진 작가 이상(李箱)의 1937년 수필 <권태>(倦怠)에는 단조로운 벽촌생활의 지루함을 기록하고 있다. 그는 '모던보이'였으니까 도시를 떠나 벽촌생활을 하면서 사는 것이 지루했던 것이다.
다음은 마지막 단락의 원문 일부이다.
〈그럼 오늘 하루를 나는 어떻게 지냈던가? 이런 것은 생각할 필요가 없으리라. 그냥 자자! 자다가 불행히, 아니 다행히 또 깨거든 최서방의 조카와 장기나 또 한 판 두지. 웅덩이에 가서 송사리를 볼 수도 있고, 몇 가지 안 남은 기억을 소처럼 반추하면서 끝없는 나태를 즐기는 방법도 있지 않으냐? 불나비가 달려들어 불을 끈다. 불나비는 죽었든지 화상을 입었으리라. 그러나 불나비라는 놈은 사는 방법을 아는 놈이다. 불을 보면 뛰어들 줄도 알고 평상에 불을 초조히 찾아다닐 줄도 아는 정열의 생물이니 말이다. 그러나 여기 어디 불을 찾으려는 정열이 있으며, 뛰어 들 불이 있느냐? 없다. 나에게는 아무것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내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암흑은 암흑인 이상, 이 방 좁은 것이나 우주에 꼭 찬 것이나 분량상 차이가 없으리라. 나는 이 대소 없는 암흑 가운데 누워서 숨쉴 것도 어루만질 것도 또 욕심나는 것도, 아무것도 없다. 다만 어디까지 가야 끝이 날지 모르는 내일, 그것이 또 창 밖에 등대하고 있는 것을 느끼면서 오들오들 떨고 있을 뿐이다.〉
'초록'마저도 권태를 불러왔던 생활이라니! 수많은 도시인들이 주말마다, 휴가마다 도시를 떠나 자연으로 자연으로 떠나고 있는데. 사실 도시인들은 도시를 떠나 생활하지 않을 것임을 알기에 자연으로 가는 것이겠지, 실제로 벽촌생활을 하게 되면 '중독성 강한 도시생활'을 그리워하지 않을까. 어려서부터 도시에서 살지 않은 나는 초록이 지겹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늘 탈도시를 꿈꾼다. 도시인의 수많은 욕망은 버리지도 못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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