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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음알음

당분간 인간 -"사실 부스러기도 좀 떨어져" 오후 5시가 늘 고비다. 고개는 책상 위 컴퓨터 모니터를 향해 점점 더 진출하고, 허리는 자연스레 둥그렇게 말아지는, '바르지 못한 자세'의 절정이 되는 시기. 여느 직장인들이나 느끼는 피곤의 절정. 단 것도 당기고, 머리도 멍해지고, 일의 처리 속도와 상관없이 하염없이 피곤의 블랙홀 속으로 빨려드는 시기. 그래서 가끔은 '내가 컴퓨터처럼 기계가 아닐까'하는 착각이 들 때도 있는, 그런 때. 그럴 때, 이 소설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작년 봄엔가 읽은 서유미의 (2012, 창비)(단편소설들을 모아 낸 소설집으로, 여러 소설 중에서도 '당분간 인간'이란 소설이 특히 더 기억에 남았다.)의 주인공처럼 내가 "부스러기가 되거나 물컹물컹 액체 덩어리가 돼서 녹아버리는 건 아닐까"하는 다소 공포스러운 걱정이 뇌리.. 더보기
유혹하는 플라스틱 전 세계에서 성형수술을 가장 많이 하는 국가는 미국이다. 인구 1000명당 성형수술을 가장 많이 하는 국가는 한국이다. 미국과 한국은 (안에서나 밖에서나) 모두 '성형공화국'으로 불린다. 미국 사회학자 로리 에시그는 (2014.1, 이른아침)에서 "성형수술과 미국 경제의 붕괴 사이에 어떤 연관관계가 있는지"를 말한다. 플라스틱 서저리. 성형수술. 플라스틱 머니. 신용카드. 미국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플라스틱'에 대해 고찰한 책이다. 이 책은 '성형'이라는 구체적인 행위가 이뤄지는 역사적, 사회문화적 배경을 먼저 짚었다. 전쟁과 우생학, 영화의 시대 등장 등등. 플라스틱 머니와의 연관성은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터지면서 더 긴밀하게 드러났다. 신자유주의는 모든 것의 결과를 개인의 책임으로 .. 더보기
사물의 심리학 연필, 녹색 머리띠, 체크무늬 자켓, 저금통, 일기장 …'엄마가 사준 연필', '10살 생일선물로 받은 녹색 머리띠', '언니에게 물려받은 체크무늬 자켓', '스무살을 기록한 일기장' … 앞서 언급한 내 주변의 사물에는 각각의 사연이 있다. 그 사물이 내게 와서 쓰이다가 쓰이지 않게 돼서 어딘가에 보관돼 있는 지금까지. 수많은 사물이 내게 왔다가 사라졌고, 일부는 '보관'돼 있다. 지금 쓰이는 사물 중에서도 소중한 것도 있고, 있는 듯 없는 듯 어딘가에 '쌓여 있는' 것들도 있다. 너무 쉽게 왔다가 가버리는 것들(?)이 많다. 너무 많은 소비를 하는 탓이고, 그 소비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지 못하면서 살고 있다. 또 너무 흔해서 아까운 줄 모른다. (흥청망청 물건을 쓰고 있구나!) 그래서 '감정'이 담긴.. 더보기
"한정된 목적은 인생을 간결하게 한다." 가만히 자신이 살아온 길을 되짚어볼 때, 그 길까지 오게 된 과정은 선택의 연속이고 그 선택은 대부분 '우연'일 때가 많다. 계획한 대로 되지 않는다는 게 인생이라고 누구나 말하듯이. 그 선택이 자신의 몫일 때도 있지만 타인에 의해 강요받을 때도 있을 것이고 애초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수도 있다. 그런 수많은 경우의 수의 총합이 현재에 이른 자신일 텐데, 어떻게든 일관적인 삶을 살아온 사람을 보면 참 '신기'하다. 어떤 강한 흐름이 그를 하나의 길로 가게 만들고, 흔들리지 않게 하고, 내면에서도 강한 욕구가 일어나는지. 무라카미 하루키의 최근 소설 의 주인공 다자키 쓰쿠루는 그의 이름처럼(쓰쿠루는 일본어로 '만들다'는 뜻) 역을 좋아하고, 그래서 역을 만들기 위해 나고야에서 도쿄에 있는 대학을 오게 되.. 더보기
서른 넘어 함박눈 지난 토요일, 원룸 속에 앉은 나는 TV리모콘만 붙들고 있었다.간만에 느끼는 평화로움이라고 오전까지는 괜찮았는데 어쩐지 내 몸덩이가 뭉게뭉게 구름이거나 미끌미끌 아메바가 된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TV에선 눈이 내리고 있다는 오후 뉴스가 나왔다.대충 차려입고(정말 대충) 일단 집을 나섰다. 가방에 책 한 권, 편지지와 편지 봉투, 휴대폰과 다이어리를 넣었다. 이 소품들로 보면 내 발걸음은 응당 카페로 향해야 했다. 그렇게 '도시인' 놀이에 빠져들었다. 책은 회사 후배가 그냥 준, 분홍색 배경에 함박눈이 내리는 표지를 가진 이었고, 편지지와 편지 봉투는 지난해 여름 일본 출장길에 사온 세로쓰기 편지지와 잠든 고양이 얼굴이 그려진 편지봉투였다. 여기까지의 소품을 보면, '좀 감성적인 젊은이'나 '시절 좋은.. 더보기
천국보다 낯선, 빛으로 말하면 옅은 회색, 아니 투명한 회색. 날씨로 말하면 안개가 끼었는데, 진눈깨비가 끊임없이 내리는 날. 사람으로 말하면, 염세적이고 허무주의에 갇힌 것 같지만 멋진 관계를 꿈꾸는 소녀같은 이. 이장욱의 장편소설 을 읽으며 이렇게 '시어(詩語)'같은 문장들이 맴돌았다. 이 소설은 영화 을 모티브로 삼았다. (영화를 못봐서 마저 의미가 다 와닿지 않은 건 아닐지). 이 소설의 중심은 대학 동창인 A의 부음을 듣고 K시의 장례식장으로 향하는 3명(혹은 4명)의 인물이 각각 1인칭의 시점으로 삶과 인간과 또 그들과의 관계에 대해 '털어놓는 서술'이다. 내가 보는 것과 네가 보는 것이 다르고, 우리 관계도 입장에 따라 다르게 정의되는 것. ‘정’, ‘김’, ‘최’란 각각의 화자들이 기억하는 A의 모습은 모.. 더보기
“사장이 나빴어” 한 해를 마무리하는 겸 다이어리들이 쌓인 박스를 열었다가 어느 해 다이어리에서 알베르 카뮈의 단편 에 대한 메모를 찾았다. 이 메모는 아마 대학에 다닐 때쯤 적어놓은 것 같다. 아르바이트를 하긴 했지만 학생 신분이었기 때문에 '벙어리'라는 단어에서 오는 맥락을 그때는 다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카뮈는 최저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임금을 올려달라며 파업을 하는 노동자들을 벙어리로 묘사하고, 그들의 파업을 '아우성'이라고 표현했다. 말하지 못하는 이들의 아우성이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을 것이란 역설이었다. 그리고 그들을 무력하게 만든 것은 그들의 '빠른 포기'가 아니라, "(그마나 적은) 임금도 주지 않겠다"고 더 강하게 나오는 사장의 엄포와 가족의 그늘진 얼굴이었다. 주인공은 집에 돌아와서야 "사장이 나빴어.. 더보기
"폭력에 이로운 문장은 단 한 문장도 써서는 안 된다" 늦가을 오후, 갑자기 폭우가 쏟아졌다. 이 블로그에 만들어놓은 '소설 속 한 줄'의 첫 줄을 채워넣기 위해 기억에 남아 있는 문장들을 곰곰 생각하다가, 역시나 첫 번째는 이 문장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실, 완전한 문장으로 '기억에' 온전히 남아있는 문장이기도 했다. 작가 신경숙의 2010년 소설 (문학동네)에 있는 문장이다. "폭력에 이로운 문장은 단 한 문장도 써서는 안 된다." 그리고 소설 속 주인공이 그 문장이 들어 있는 원고를 읽었을 때 느꼈던 '반듯하게 펴지는 느낌'을 나도 가끔 이 문장이 찍힌 사진을 보고, 반듯하게 펴지는 느낌까지는 아니더라도 '문장'이라는 것의 중요성을 되새기곤 했다. 이 책 표지가 무릇 '가을 빛'이어서일까. 표지는 가을빛이지만 이 책의 이미지는 새하얀 눈밭이다. 다만..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