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음알음2014.10.19 19:43



지난해 결혼을 하고, 올핸 아이를 낳아 어느덧 아기 엄마가 돼버린 친구 집에 들렀다가 돌아오는 길, 한 지방의 기차역에서 이 책을 샀다. 기차 시간이 꽤 많이 남아 있었고, 무난히 읽어나갈 소설이면 좋겠다 싶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은 대부분 연애소설이다. 그리고 젊은이의 삶과 사랑을 되돌아보게 해서, 풋풋하고 아련하고, 때론 어른스러워지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여자 없는 남자들>은 소설 속 화자들이 중년 남성’, 그것도 여자없는 남자들이라서 도대체 감정이입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들은 왜 이렇게 사고하는가, 이들에게 여자는 절대적이면서도 또 자기 존재 증명을 위해 필요한 대상이고, 그런데 여자 없는 남자들이나 대개는 비정상적(?)이라는 생각이 드는 소설이었다. 실제로 현실에서 여자 없는 (중년의) 남자들이 그러한지 모르겠으나 이 소설 속의 남자들은 좀 이상했다. 완전함 속에 불완전.

 


<여자 없는 남자들>은 단편집이다. 사랑하는 부인이 병으로 세상을 떠난 뒤 무념하게 무대에 오르는 배우 가후쿠와 그의 전속 운전 기사 미사키가 주고 받은 이야기. 결혼을 하지 않은 채 수많은 여성들과 적당히 만나오던 50대 성형외과 의사 도이카가 깊은 사랑에 빠진 후에는 인간으로서의 기능하는 법을 잃어버리는 이야기. 부인의 외도를 목격하고 도피하듯 마련한 술집에서 기노라는 주인공이 자신을 지켜보던 남자 가미타와 어떤 여성과의 만남을 풀어나가는 이야기 등등.

 

이런 단편 중에는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변신>의 반대 버전, 그러니까 어느날 깨어보니 자신이 인간이 되어 있는 상황. 인간으로 먹는 법, 옷을 입는 법, 여자를 대하는 법 등을 깨달아 가는 과정은 꽤 재미있다. 텅 빈 집안에 잠자 혼자였고, 열쇠를 고치겠다며 한 여성이 엉거주춤 집으로 온다. 바깥 세계는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 검열의 시대. 엄혹한 시기에도 방문을 고치는 일, 이런 사소한 일의 위대함을 설파하는 대목은 왠지 숙연하게 만든다.







"설령 세계가 지금 당장 무너진다 해 자잘한 일들을 꼬박꼬박 착실히 유지해가는 것으로 인간은 그럭저럭 제정신을 지켜내는지도 모르겠어요."

친구가 결혼이라는 인생의 한 의식을 치르고 아이를 낳아 하루 하루, 그 하루속에서 또 하나 하나 삶의 단계를 차분히 거치며 걸어가고 있다는 것이, 그 친구처럼 나도 그저 하루 하루를 자잘한 일들을 채울지언정 어떤 막연한 공포와 두려움에 예속되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면 그것으로도 위안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왠지 뭉클해졌다. 세계가 미치면, 인간도 미칠 수밖에 없는, 인간은 매우 사회적인 동물이지만 인간의 정신의 영역은 때로 그 세계의 미침에서 자신의 정상성을 지키기 위해 방어적으로 무언가를 꼬박꼬박 해내고, 그것이 인간의 사회가 언젠간 제자리로 돌아올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다주었다. 지금 우리 사회도, 제정신을 지키기에 팍팍한 사건들이 터지고 상처받기 쉬운 사회다. 그러니 스스로 자잘한 일들을 잘 해내는 것으로서, 맞설 수밖에. 우선 그것부터라도 하는 수밖에.(이건 결코 소극적인 저항이 아닐지도 모른다.)

 



우리는 누구나 끝없이 길을 돌아가고 있다지만, 그럼에도 그 길마다 차곡차곡 자잘한 일들로 채워지고 있다는 게, 문득 고맙기도 했다. <여자 없는 남자들>의 세계는 오롯이 이해할 수 없었으나 그저 인간다움의 세계의 본질은 크게 다르지 않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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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음알음2014.10.18 11:12



밀란 쿤데라의 소설은 어렵다. 그런데 재미있다. 소설 속 주인공의 생각이든 쿤데라 본인의 생각이든 끊임없는 고민의 연속성이 왠지 모르게 마음에 들었다. 무언가를 골몰히 생각하는 사람의 모습, 이 부러웠다. 그의 소설은 읽으면 그게 허세로 보이지 않았다. 그 생각의 끝이 무엇인지 어떤 지점이 이런 생각을 야기했고 그는 사회와 어떻게 소통하려고 애쓰는지 스스로 정리해보는 것도 좋았다. 물론 그걸 잘 해낸 것은 아니지만, 솔직히 어렵지만, 그래도 좋았다. <무의미의 축제>는 알랭, 칼리방, 샤를, 라몽 등 4명의 주인공이 등장해 각자의 시선으로 장면을 구성한다.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라는 문제를 풀어가는 것과 같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처럼, 존재의 본질은 무의미라고 해석한다. 그것을 인정하는 것은 용기가 필요할 뿐만 아니라, 그 존재의 무의미성을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어쩌면 그것은 지혜의 열쇠이다. 염세주의나 회의주의가 아니고서, 존재의 무의미성을 인정하면서 살기란 쉬운 일이 아닐 터다. 수많은 순간에 무의미가 자신의 존재 가치를 갉아먹을 것이기에. 그것 또한 사랑해야 하다니. 



소설 속에선 <사과쟁이들>이 등장한. 알랭은 먼저 사과부터 하고보는 사과쟁이. “삶이란 민안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지. 다들 알아. 하지만 어느 정도 문명화된 사회에서 그 투쟁은 어떻게 펼쳐지지? 보자마자 사람들이 서로 달려들 수는 없잖아. 그 대신 다른 사람한테 잘못을 뒤집어씌우는 거야. 다른 이를 죄인으로 만드는 자는 승리하리라.” “사람들은 사과로 다른 사람의 환심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샤를의 말에 알랭은

 

맞아. 사과하지 말아야 해. 하지만 그래도 나는 사람들이 모두 빠짐없이, 쓸데없이, 지나치게, 괜히, 서로 사과하는 세상사과로 서로를 뒤덮어 버리는 세상이 더 좋을 것 같아. 라고 말한다. 서로에게 사과만 하는 세상이라면, 누구나가 다른 이에게 져주는 세상,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아닌 만인에 대한 만인의 항복이라고 해야 하나







다소 멍청해보이고 어리석어 보여도 나도 사과가 넘치는 세상이었으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그것으로 타인의 환심을 사려는 게 아니라, 모두가 상대를 이겨보려고 하는 세상에 대한 안티테제로서. 이렇게 생각할 수 있어서 너무나 무의미하지만, 무의미하지 않다, 삶은.






(+ 이 소설 중 스탈린과 칼리닌의 인연에 대해 서술한 부분이 있다. 그 부분이 꽤 흥미롭다. ‘칼리닌그라드[각주:1]란 도시명의 유래를 소개한다칼리닌이 전립선 비대증으로 고생했고, 이를 안타까워하던 스탈린이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는.... 이곳은 임마누엘 칸트가 살았던 곳이다.)

 

  1. 프레골랴강(江)이 칼리닌그라드 석호(潟湖)로 흘러드는 하구에 자리한다. 그곳에서 석호를 횡단하여 발트해(海)에 면하는 외항 발티스크까지 약 40km는 운하로 연결된다. 발트해의 중요한 부동항이자 해군기지로서 산업·어업·상업의 중심지이다. 1255년 보헤미아의 왕 프르셰미슬 오타카르 2세의 권고로 튜턴 기사단에 의하여 요새가 건설되었으며, 1340년에 한자동맹에 가입하였다. 1701년 브란덴부르크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가 프로이센의 초대 왕 프리드리히 1세로 즉위했다. 제1차 세계대전 때는 독일군과 러시아군 사이의 치열한 접전 지역이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 때 심하게 파괴되었다. 독일령일 때에는 쾨니히스베르크(Königsberg)라 하였으나, 1945년 소련령이 된 것을 계기로 소련의 지도자 M.I.칼리닌(M.I.Kalinin)을 기념하여 현재의 명칭으로 개명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칼리닌그라드 [Kaliningrad] (두산백과)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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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음알음2014.10.01 15:19




최근 일본 온타케산(御嶽山) 분화를 계기로 아베 신조 정권이 강행하는 ‘원전 재가동’ 정책을 재검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다시 높아지고 있다고 한다. 2011년 3월11일 동일본대지진으로 후쿠시마 원전사고가 터진 뒤 원전 문제는 일본 사회의 뜨거운 감자였으며, 한국도 마찬가지다. (기사 읽기 >>“화산 주변 재가동 철회를” 일본 잠자던 ‘탈 원전’ 논의도 다시 분출)      2011년 3월11일 후쿠시마 원전 하청업체 직원 니이쓰마 히데아키는 원전 사고 이후 삶의 기반은 송두리째 무너졌다고 했다. 그의 조모와 부모, 4형제가 함께 살던 대가족은 사고 이후 뿔뿔이 흩어졌다. 한국 원전의 연이은 오작동과 정지 조치에 대해 니이쓰마는 “결코 가볍게 받아들여서는 안된다”고 했다. 니이쓰마는 “작은 사고들은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는 징후”라며 “작은 사고를 수습했다고 안심할 게 아니라 근본적인 대책을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기사읽기>>“한국 원전 잇단 오작동·정지 조치 등 작은 사고들 큰 사고 가능성의 징후”



<원자력 프로파간다>(클, 2014)는 광고대행사에서 18년간 근무한 혼마 류가 전력회사(혹은 일본 정부)의 미디어통제를 통한 원전 프로파간다를 사례를 통해 설명한 책이다.  (책 소개 기사 읽기>> [책과 삶]일본인들의 눈을 가린 교묘한 원전 홍보




일본 정부와 전력회사가 막대한 광고비를 투입해 원전에 대한 안전 신화를 만들고, 원전의 필요성을 국민들에게 세뇌해왔다는 증거로서 다양한 사레가 등장한다. 일부 광고의 문구눈 "허위 사실"이었고, 많은 출연료를 지불하고 유명 연예인을 동원했다. '의견 광고'인 경우에도 마치 객관성을 확보한 기사처럼 언론 매체에 등장했다. 반대 의견 광고가 나설 자리는 자본력 앞에서 무력해졌고, 광고 수익이 절대적인 언론사들은 자발적인 침묵에 가까웠다. 아래는 책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일본 원전 추진은 국책이어서 정부를 정점으로 하는 원전 추진 세력은 일찍이 이를 홍보하는 데 매진/1970년대부터 부지런히 여러 미디어를 통해 원전의 안전성, 필요성을 설파

-미국의 스리마일 섬 사고(1979.03.28)와 옛소련의 체르노빌 원전사고(1986.04.26)이 터졌지만 그때마다 홍보를 강화해 원전의 위험성을 다루는 비판 보도를 억제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전에는 원전 추진에 대한 국민 지지가 59.8%에 이르렀으며, 현상 유지 의견(18.8%)을 포함하면 약 80%에 이르는 비율이 국가의 원전 추진 정책을 지지(일본 내각부 자료, 2009)


-저자가 뽑은 최악의 허위 광고는 다음과 같은 문구를 사용했다. “원전은 절대로 사고를 일으키지 않는다” “만에 하나 사고가 일어난다 해도 방사능은 절대로 밖으로 누출되지 않는다” “원전은 안전하며 안심할 수 있는 시스템” (이런 문구는 후쿠시마 사고 이후에는 사라졌다고 한다.)

-또한 “원전은 천연자원이 부족한 일본에서 생산하는 순 국산 에이너지” “원전은 이산화탄소를 발생시키지 않는 청정 에너지” “원전은 친환경 에너지” “원전은 재활용이 가능하며 값싼 에너지” 등의 구호를 자주 사용했다.

-광고비 2000년대 연 300억~500억엔(도쿄전력과 전기사업연합회 보급개발관계비의 합계)에 달했다.



하지만, 2011년 3월11일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이런 광고들이 일제히 자취를 감췄음. 신규 광고 정지는 물론이고 각 매체의 광고 아카이브, 원자력 이익집단 소속 회사 단체 등의 홈페이지에 실려 있던 과거 광고 작품도 모두 삭제, 각종 동영상 사이트에도 삭제 요청 등 철저한 애도를 취함. (책의 저자는, 책임을 피하기 위한 조치라고 비판한다.)


원자력 광고의 힘의 원천은 기초자금이 전부 전기요금에서 ‘총괄원가방식’으로 공출. 일반적으로 기업의 광고 예산은 그 기업의 제품 매출에서 나오는 이익에서 잡게 되지만 원전 광고 예산은 전기 요금이 상승하면 같이 올라가기 때문에 사실상 상한선이 없음. 도쿄전력의 광고비에 해당하는 보급개발관계비는 1965년 7억6000만엔에서 2010년 269억엔까지 늘어남. 아사히신문에 따르면 9개 전력회사가 1970년부터 2011년까지 42년 동안 2조4000억엔이 넘는 보급개발관계비(광고선전비)를 지출. 릿쿄대학 스나카와 히로요시 준교수(미디어사회학과)는 “광고비가 급증했던 시기부터는 많은 광고비를 투여함으로써 미디어에 대한 영향력을 증가시켜 원자력에 대한 부정적인 보도에 주목하지 못하레 하려는 의도가 투영된 것으로 보인다. 보급개발관계비는 전기요금의 일부이며 각 전력회사가 이용자에게 실태를 설명할 의무가 있다. 미디어 측도 원자력 보도를 금기시하지 않았는지 등에 대해 자체 검증이 요구된다”고 말함. 보급개발관계비 이외에도 판매촉진비 등도 있음.


-1988년5월30일자 요미우리신문 광고

“원자력발전은 일본을 위해서도, 세계를 위해서도 필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세한 곳까지 충분히 주의하여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이러한 노력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1974년 8월6일자 아사히신문 10단 광고, 일본원자력문화진흥재단

14회 시리즈로, 원자력에 대한 전문가 질의응답 형식. 1975년 7월26일  ‘원자력발전의 안전 문제는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에서 미국 전력연구소 소장 촌시 스타가 등장 “플루토늄과 방사성 폐기물이 문제가 되지만 기술적 해결이 가능하다”고 언급하지만, 이 문제는 지금까지 해결되지 않았고 플루토늄 관리와 방사성 폐기물 최종처리장이 국가적인 문제가 되었음.


사고가 증가할 때마다 광고비도 증가. 다음은 주요한 원전 사고.

1979년 3월28일 스리마일 섬 사고 -레벨 5

1986년 4월26일 체르노빌 사고 - 레벨 7

1995년 12월8일 고속증식로 몬주 나트륨 누출사고 (15년간 운전 정지)

1999년 9월30일 도카이무라 JCO 임계 사고 -레벨 4

2002년 8월29일 도쿄전력 원전 고장 은폐 발각

2004년 8월 9일 간사이전력 미하마 3호기 배관 파손 사고

2007년 7월16일 도쿄전력 가시와자키 가리와 원전 사고

2011년 3월11일 도쿄전력 후쿠시마 제1원전 사고 -레벨 7


신문 아카하타에 따르면, 체르노빌 사고가 일어난 1986년 126억엔이었던 도쿄전력 보급개발관계비가 이듬해 150억엔으로 증가, 1988년엔 180억엔, 1989년엔 200억엔 돌파. 1990년 224억엔으로 증가. 원전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은폐하려던 시도가 발각되기 전해인 2001년에는 239억엔이었던 예산이 2002년에는 사고 은폐 여파로 203억엔으로 감소, 이듬해에는 213억엔으로 약간 증가. 관심이 줄어들자 2004년엔 268억에으로 증가. 2005년엔 293억엔으로 사상 최고를 경신. 잃어버린 신뢰를 만회하기 위해 돈을 더 많이 뿌림. 



원전 광고의 목적

1. 국민 세뇌

예) ‘원전은 이산화탄소를 배출시키지 않는다’는 문구로 선전 → ‘원전 발전시’에는 이산화탄소를 배출하지 않지만 발전에 수반되는 갈 곳 없는 대량의 바사성 폐기물을 발생시키기 때문에 실제로는 친환경적이지도 청정하지 않음.

2. 미디어 회유

예) 원전 사고가 터지면 광고비가 증가, 도쿄전력이 최대 광고주로 부상. 미디어는 광고주에게 부정적인 기사를 억제하려는 경향. → 미디어 자체적인 규제를 이끌어냄. 


다양한 광고 전략들

1990년대 이후 ‘원자력 문화인’ 육성

원자력 추진파 단체 형성

반대파에 토론회 제안

책 출간


“의견광고의 경우, 유럽과 미국에서는 반론권이 제도화돼 있습니다. 반론권이 보장돼 있지 않다면, 돈이 있는 쪽의 의견만이 일방적으로 광고가 됩니다.” 


2008년 원전이 ‘깨끗’하다는 표현에 의문을 품은 사람이 일본광고심사기구(JARO)에 이의제기를 함. 이에 ‘원자력발전에 깨끗하다는 표현을 쓰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재정.


일본 원전 광고의 역사

·1970년대-원자력 광고의 여명기 : 오일쇼크를 경험하면서 천연자원이 부족한 일본에는 스스로 운용할 수 있는 전력 자원이 필요하다는 것이 강조돼 있고 제대로 컨트롤 한다면 안전한 시스템이라는 계몽적인 내용의 광고가 다수.

·1980년대-원자력 광고의 발전기 : 표제에 ‘안전’ ‘안심’ ‘에너지의 3분의 1은 원자력’ 등의 말을 자주 사용.

·1990년대-원자력 광고의 완성기 : 독자 의견 모집, 어린이 대상 광고, 안내전화 설치 등 적극적인 홍보.

·2000년대-원자력 광고의 난숙기 : 2002년 도쿄전력 원전 문제 은폐 사건 때문에 정체됐다가, ‘지구온난화 방지’ 분위기에 편승해 ‘원전은 이산화탄소를 배출하지 않는 친환경 에너지’라는 선전문구 사용.


*원전에 대한 홍보 문구를 찾아 한국수력원자력 홈페이지를 찾아봤더니 원전 홍보를 위한 문구는 2000년대 일본의 원전 홍보 문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원전의 안전성을 홍보하는 이런한 문구들에 허위나 과장이 있는 것은 아닌지, 또 원전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문구는 국민들이 쉽게 접하는 반면 원전 건설을 반대하는 측의 '반대 의견'이 설 자리는 충분히 마련돼 있는지 등 한국의 '원전 프로파간다'도 점검해볼 사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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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음알음2014.08.03 18:03



SBS 수목드라마 <괜찮아 사랑이야>를 보고 있으면 뭔가 어수선하다. 등장인물들의 캐릭터도 그렇고, 그 사람들의 관계도 그렇고 그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도 어수선하다. 정리도 되지 않고, 가끔 이해할 수 없는 행동도 하고, 이 사람들은 삶에 진지한 것 같은데 또 그렇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대개는 이 드라마를 두고 "현대인은 저마다 어느 정도의 정신 질환을 안고 살아간다"고 해석한다. 어떤 일을 겪었든 그것은 마음의 병이 되고, 그것이 그 사람의 현재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이 드라마가 그런 지점을 비교적 유쾌하게 풀어내고 있다면, 소설 <밤의 고아>(윤보인, 문학과지성사, 2014)는 침침하고 폐쇄적이며, 외적으로도 심한 장애를 겪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이를 테면, 어두컴컴한 건물 한 채에 모여사는 등장인물들의 삶은 괴로운 과거의 연속이거나 마지못해 살거나 파괴를 위한 삶이거나, 흔히 가난한 소외된 이들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럼에도 삶이라는 것에 대해 누구보다도 악착같이 들여다보는 사람들이다. 한때 기자로서 이상과 쾌락을 좇아 한 사람을 동경하다 결국은 자식을 잃은 후 다리 한쪽을 잃은 장애인으로 등장하는 '로'. 난쟁이 가족으로 태어났지만 키가 큰 여자 '류', '류'는 아이를 낳아 난쟁이가 아닌 것을 확인하고 싶어했고, 그러나 그 난쟁이 가족의 아버지는 그 누구보다 삶에 대해 평온함을 가지고 있었고, 그 여자의 연인이었던 남자는 어려서 부모를 한꺼번에 잃은 후에 먹는 것조차 의미가 없어져 버린 주유소 직원 '기'이고, '기'의 여동생은 남들이 보기엔 '막 사는 것처럼'보였지만, 삶의 의지를 지키지 못해 자살해버린다. 그리고 폐차장에 버려진 채 발견된 '여'는 '부모를 소유할 수 없었기 때문에 아이를 소유하고자' 아이를 원하지만 매번 유산하고, 폐차장에서 평온을 느낀다. 어딘가 아프지 않고는 살 수 없는 것처럼 이들의 인생은 얼룩져 있다. 그러나 한결같이 이들은 "살아야 하는 이유"를 찾는다. 이들은 거칠다. 과격하고, 때로는 범죄를 상상하기도 한다. 



다소 극단적이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이 소설 속 등장인물과 같은 이들을 수없이 마주칠 터이다. 소설을 읽다보면 이들의 폭력성은 자신을 향하고 있지, 타인에게는 아니다. 마음 속으로 타인을 향한 저주를 퍼붓고 혐오의 감정을 드러낼지언정,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이 폭력성의 근원은 무엇이고, 과연 그들을 위로할 수 있는 건 무엇일까. 우리 모두에게 있는 내면의 폭력성, 혹은 삶에 대한 두려움과 한편으로는 경외심 등을 이 등장인물들이 극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막장 드라마라 할지라도 등장인물의 욕구는 삶에 대한 욕구와 사랑에 대한 갈구로 이어진다. 그게 너무 편협하게, 극단적으로 그려지니 문제지만. 사람과 사람이 연결돼 있다는 느낌 만으로도 삶의 충분함을 경험할 수 있다고 한다. 세상과 사람에게 상처받았다가도 어느 순간 치유의 손길도 오기 마련이다. (그렇게 믿고 싶다.) 그게 어떤 사건이나 어떤 순간보다도 그저 '사람'인 경우가 많을 것이라 짐짓 생각한다.


이들이 삶에 대해서 이런 태도를 가지게 된 것은 다만 자신의 어린시절에서의 상처나 폭력적인 경험뿐만이 아니다. 그저 먹고 살기 위해 수많은 날들을 일터에서 보내면서, 삶이 무료해지는 순간이 쌓여가는 것에 대한 반발심이기도 하다.




"그 역시 멀리 달아나버리고 싶었다. 떠나기 위해선 돈과 용기가 필요했다. 하지만 그에겐 아무것도 없었다. 피로와 권태, 무거운 슬픔, 그것만이 전부였다."


등장인물 중 주유소 직원인 '기'가 하루를 마감하며 느낀 권태의 한자락. '기'는 이렇게 무책임하고 피해의식 속에 사는 것처럼 보였지만, 소설 말미에 고백한다. "한번쯤은 살아보고 싶다"고. 인간으로서 도피에의 욕망은 누구나 있을 것이다. 정당한 도피, 휴가. 그래 휴가를 앞두고, 기운내자고.



Posted by sokhm
알음알음2014.07.09 16:51



반값 등록금 실현을 촉구하는 집회가 한창일 때였다. 스테판 에셀의 <분노하라>(2011, 돌베개)가 국내에서도 주목을 받았다. 경향신문 1면에도 실렸던 기억이 난다. '2030'으로 표기되기도 하고, 젊은 세대라고 불리는 한 세대 구성원들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던 시기였다. 이들이 '분노했다'는 것에 사회는 주목했다. (사실 등록금 문제는 등록금을 부담해야 하는 학부모 세대와 함께 고민하는 우리 사회의 문제였다.) 이 책이 주목받은 것처럼, 거리로 나온 '젊은 세대'가 무언가를 바꾸길 바랐다. 청년층을 중심으로 한 '아랍의 봄'을 거친 뒤라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2012년 4월 총선에서도 청년층을 향한 정치권의 손짓이 두드러졌다. 청년비례대표를 뽑았고, 대선을 앞두고 반값 등록금 실현이 공약으로 나왔다. 그렇게 '분노하는 것'의 행위가 정치와 정책에 영향을 준 것일까. 벌써 3년이 흘렀다. 무엇하나 바뀌었는지 모르겠다. 표면 그대로, 여전히 그대로인 것 같다. 그렇지만 희망은 여전히 젊은층에게 있다고 믿는다.


스테판 에셀의 <참여하라>(2012, 이루)는 프랑스 작가이자 비정부기구인 '희망리포터'의 편집장으로 일하고 있는 질 방데르푸텐과 에셀의 대담을 엮은 것이다. 여기서는 사르트르의 말을 인용한다.  "사람은 참여할 때, 그리고 자신의 책임을 느낄 때 비로소 참된 사람이다." 개인적으로든, 조직적으로든 분노의 대상이 있다면 저항하고, 저항하는 행동에 참여하라는 취지일 터이다. 


에셀은 젊은세대와 옛 세대의 레지스탕스(저항)가 다르다고 했다. 분노해야 할 대상은 언뜻 비슷할 수 있지만, 저항하는 방법은 달라야 한다. 사실 저항해야 하는 대상도 확대되었다. 그럼에도 세계시민들이 연대할 수 있는 길도 열려 있어, 어쩌면 이 세대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낙관'했다. 과연 젊은 세대에게 그럴 힘이 있는가. 그럴 '기회'는 주어지는가. 또 하나, '생태주의'에 입각한 저항을 펼쳐볼 수 있는가. 에셀과 질의 대담에서 몇 구절 인용한다.





에셀 : 저항이란 무엇입니까. 무엇보다 우리 주위에 터무니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이에 강력히 맞서 싸워야 한다는 생각을 갖는 것입니다. (24쪽)

질 :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라면 주로 어떤 것을 꼽을 수 있을까요? (24쪽)

에셀 : 아무래도 가장 중요한 문제는 경제적인 것들이겠지요. 사회적 불평등 말입니다. 즉 상호연결된 지구촌 안에 극단적인 빈부의 형태가 공존한다는 것이 문제이지요. (중략) 젊은 세대들에게 이 사실을 확실히 납득시켜야 합니다. 물론 요즘 같은 시대에 불의에 저항하는 일은 나치 독일이 점령했던 시절보다 훨씬 복잡합니다. ... 지금은 어떻습니까? 지성적으로 상황을 개선하려면 깊은 성찰이 필요하고 설득력 있는 글을 써야 합니다. 또한 현명한 정치인이 당선되기를 바라며 민주적으로 선거에 참여해야 합니다. 요컨대 이 시대의 레지스탕스는 매우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말이지요. (25쪽)


질 : 최근에 많이 사용되는 개념 중에서 '지속가능한 발전'이라는 말이 있는데요. 이 개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39쪽)

에셀 : 저는 '지속가능한' 발전이라기보다는 '지탱가능한' 발전이라 해야 타당하다고 봅니다. (중략) 지탱가능한 발전이라 한 것은 야만적인 방법으로 단기간에 자원을 착취해서는 안된다는 의미에서 쓴 말입니다. (39쪽)


에셀 :  세계적인 위기가 휩쓸고 간 뒤 우리가 사는 이곳은 경제적으로 불안정하기 짝이 없는 고달픈 세상이 되었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금융화된 세계 경제에서 막대한 이득을 취하는 자들에 의해 이렇게 된 것입니다. 너무나 혐오스러운 세상입니다. 지체할 시간이 없습니다. 한시라도 빨리 정의로운 세상, 모든 이가 평등하고 자유로운 세상이 정착될 수 있도록 변화시켜야 합니다. (67쪽)


에셀은 낙관주의가 가지는 효과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는 에너지 자원을 재사용할 수 있는 경제 시스템, 빈부격차를 줄이고, 모든 인간이 사회.문화.교육의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그것을 위해서 저항하고 참여할 것을 촉구했다.  당장의 눈 앞의 현실에서의 부조리를 보고도 저항하지 못하는 나나들. 그럼에도 잊지 말아야 할 가치들, 추구해야 할 가치들, 그리고 저항해서 지키고 얻어내야 하는 것들이다. 에셀은 세계인권선언을 만들 때 참여한 사람으로, 그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다. 그럼에도 에셀은 이 부분을 강조한다. 세계인권선언으로 얻어낸 것들도 있고 그 안에서 보호하고 있는 가치들이 있지만, 그러한 권리와 가치는 여전히 빈번히 '무시'되고 있다는 사실(83쪽)이다. 


한 시간 정도만 차분히 있을 수 있다면. 그리 길지 않은 단행본이다. 더욱이 이 책 할인하는 곳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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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음알음2014.05.23 22:18



출퇴근 길에 지나는 아파트 단지 울타리에 붉은 장미가 피었다. 꽃집에서 파는 봉긋한 장미가 아니라, 꽃잎을 최대한 펼쳐보이는 새빨간 들장미다. 이 장미가 피는 걸 보니, 초여름이다. 시간도 멈추고 삶도 멈춘 것처럼 느껴지더니 그 장미의 색이 너무 붉었던 모양인지 그래도 시간은 흐르는 구나, 라고 체념처럼 헛헛한 말이 새어나왔다.


박완서의 단편소설을 엮은 <그리움을 위하여>(문학동네, 2013)에 <빨갱이 바이러스>라는 단편이 들어 있다. <기나긴 하루>라는 단편집에서도 읽었던 기억이 난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깊이에의 강요>에 '문학적 건망증'이란 에세이를 읽었던 기억이 난다. 역시나 그 말처럼, '문학적 건망증'이란 단어만 살고, 나머지는 기억 저편에 있다. <빨갱이 바이러스>라는 글도 읽었던 기억만 있을 뿐 내용을 재생해보라 하면, 기억해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야기를 읽었을 때의 충격과 아픔과 씁쓸한 이미지는 뇌리에 남았다. 일단 제목부터 강렬하지 않은가. 바이러스라는 말은 대개 사람을 병들게 하는 이미지니까.


강렬한 태풍이 휩쓸고 간 강원도의 시골마을. 중년을 넘어선 여성인 주인공은 노모의 시신을 찾지 못하는 친구를 따라 고향에 왔다가 자신의 친정집(지금은 자신이 돌보는 집)으로 가던 길에 낯선 세 여자를 차에 태우고 자신의 (친정)집에서 하룻밤 묶게 해주는 이야기로 이어진다. 소설은 그들의 인생 고백을 듣다가 결국 주인공의 '어떤 고백'을 하는 것으로 끝난다. 세 여자의 이야기가 먼저 나왔던 건, 아마도 '누구라도 그러하듯이'란 전제가 필요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주인공이 만난 세 여자의 인생은 가족들이 상처로 남았다. 소아마비를 앓은 것처럼 보이는 여성과 몸 구석구석에 뜸을 떠야 할 만큼 아픈 사람으로 보이는 여성과 불심이 지극해 수행을 할 것 같은 보살 여성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겉모습일뿐 그들의 실체는 아니다. 아예 틀렸다. 그들은 가족으로부터 폭력 혹은 그 가족들에게 스스로가 저지른 죄악으로 괴로워하고 있다. 의처증이 심한 남편에게 시달리다 성폭행 위험이 처하자 3층 난관에서 뛰어내린 여성, 장애가 있는 아이를 시설에 버리고 남편이 그 아이에 대한 죄책감으로 자신의 몸에 담뱃불을 지져대는 여성, 어린 손자를 키우다 손자의 영어선생님과의 욕정에 눈이 멀어 방심한 사이 손자가 죽어버린 여성. (이렇게 몇 개의 문장으로 정리했지만 이들의 삶이 이 문장들에 다 채워진 것은 아니다.) 소설이라지만, 이렇게 소설같은 인생을 산 사람들이 한데 모일 수 있을까.


 주인공은 그저 평범한 사람이라고 소개했지만 그에겐 도덕적 강박증이 있었다. 그러나 그건 마음 속 깊은 죄책감에 대한 신호이고, 그것을 덮어버리고자 하는 자신의 또다른 면이기도 했다. 한국전쟁 이전엔 북한 땅이었다가 휴전 이후엔 남한 땅인 자신의 어린시절의 집. 인민군이었던 삼촌이 다시는 그 집에 오지 않은 이유를 알게 된 어느날 밤의 사건. 아버지와 어머니가 '동족상잔'의 범죄를 저지른 밤, 그 범죄를 묵인했다는 걸 최후에 알게 된 자신. 주인공과 세 여자는 하룻밤 같이 지내며 깊은 내막을 주고받으면서도 서로의 신분을 알리지도,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다만 그것을 털어놨기 때문일까, 그들은 한결 가벼운 아침을 맞이했다.




어떤 아픔과 폭력을 듣기만 해도 자신의 몸에 내재된 바이러스가 반응해 곧 나타나는 것, 그것이었다. 그래서 상대가 처한 상황과는 전혀 다른 삶이었지만, 그들의 아픔을 듣는 것만으로도 자기 안의 아픔이 되살아나는 것. 그것은 치유할 수 없는, 바이러스와 같았다. 글도 마찬가지 아닌가. 분명히 다 잊어버렸는데, 비슷한 문장만 보아도 같은 감상을 되살리는 것. 시간도 마찬가지 아닌가. 분명히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 비슷한 공기만 느껴져도 같은 시절을 되살리는 것. 이 폭력의 시절이 두고두고 아픔으로 남아, 또다른 폭력과 만날 때 되살아날 것이다. 그것이 지독한 바이러스가 되기 전에 무엇이라도 해야 하지 않은가. <빨갱이 바이러스>의 마지막 부분에 이런 문장이 있다.


"폭력을 삼킨 몸은 목석같이 단단한 것 같지만 자주 아프다."


엄혹한 시절에서 '어쩔 수 없었던 것'이라고, 그 폭력을 만든 이들의 잘못이라고 말하고도 싶지만

그럼에도 그 폭력을 묵인했던 자의 고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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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박완서
알음알음2014.03.27 18:10


또록 또록, 눈물이 맺히는 문장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경험하지 않은 시대의 아픔이, 너무나 선.명.했다. 공선옥 작가의  <그 노래는 어디에서 왔을까>에선 마음에 맺히는 '한 줄'을 발견하기 어려웠다. 한 문장이 바로 다음 문장을 불러냈고, 그 문장들은 슬픈 노래의 연속이었다. 멈추면 안 될 것 같은. 



<그 노래는 어디서 왔을까>(2013, 창비)에는 정애와 묘자, 두 여성의 삶이 그려진다. 1970년말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때 시골과 1980년 광주민주항쟁이 일어났던 광주를 배경으로 정애와 묘자의 삶이 어떻게 '흔들리고 찢어지고 슬픔이 되는지'를 그린 소설이다. 시대배경을 강조하지 않고, 개인의 삶이 세세하게 묘사되는데도 자꾸만 그 삶이 안타깝고 그 시대가 아프다. 



가난한 시골에서 정애가 이웃들에게 약탈을 당하고 부모를 잃고 동생들을 데리고 도시로 나오기까지, 할머니와 살던 묘자가 도시에 나와 광주민주항쟁 때 군인들에게 끌려가 삼청교육대까지 다녀온 '아픈 청년' 박용재를 만나기까지, 정애가 이 도시에서 '그날' 군인들에게 당해 정신을 놓아버리기까지, 묘자가 사랑하는 '박용재'가 점점 더 과거 속으로 빠져들어 결국엔 묘자를 알아보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기까지, 묘자가 군인의 애를 가졌다며 자신의 배를 가르려던 박용재를 죽이기게 된 과정이, 정애가 다시 시골로 돌아갔을 때 이웃들이 정애를 말려가는 과정이 슬프고 아프고 그랬는데, 그 시대에는 그런 일들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 노래는 어디서 왔을까>에서 많은 엄마들이 등장한다. 정애와 묘자는 온전한 엄마를 갖지 못했다. 정애는 언어장애가 있는 엄마가, 묘자는 새로 시집을 가버린 엄마가 있지만 엄마가 곧 사라진다. 그래서 그들은 동생들의 엄마로, 박용재에게 엄마로, 스스로의 엄마로 살아간다. 상처와 아픔은 온천하에 그득그득 붙어있는데, 이를 수용해줄 이를 치유해줄 엄마는 없다. 본인도 엄마가 되기에도 힘든 시절이었다. 그래서 "사람들 모두가 미친 세상"이라고 누군가 말한다. 그래서 '미친 정애'가 오히려 정상인지도 모른다고 누군가 말한다. 그럼에도 그 시절에도 사랑이 있고, 그 삶을 견뎌내는 사람들이 있었다. 

(창비, 2013)



이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저마다 노래를 한다. 어린 정애가 이웃들에게 겁탈당할 때 노래를 하고, 아픈 박용재가 끼웃끼웃 이상한 소리를 내고, 묘자와 정애를 돌봐주는 숙자는 노래연구소에서 노래를 가르친다. 대나무가 이상한 소리를 내고, 생쥐들도 바스락바스락 소리를 낸다. 뜻이 없는 언어들이, 노래가 돼 여기저기 나온다.





  시골로 갔던 정애가 사라지고, 감옥살이를 하던 묘자가 정애를 그리워했던 한 움큼의 세월이 지나고 어느 가을밤, 흰머리가 난 묘자는 식당 장사를 한다. 어떤 여자가 찾아가 '햇빛 속에서 일렁이는 그림자가 내는 소리' 같은 노래를 한다. 묘자가 여자에게 지금 부르는 노래가 무은 노래냐고 물었다.


"내 노래는 어디서 왔을까"

  '이미 세상 저 너머로 간 사람 같기도' 한 목소리가 여자는 말했다.


"나는 어디서 왔을까, 내 노래는 어디서 왔을까, 나는 어디로 갈까, 내 노래는 어디로 갈까......"


여자는 그리고 사라졌다. 노랫소리도 사라졌다.


 묘자가 정애인가 싶어 뒤쫓아갔을 때는 여자도 노래도 사라진 뒤였다.

 

두 사람의 인생이 있다. "세상 사람들이 지은 죄에 너희들만 벌을 받는 것 같다"고 용순이가 말했다. 어쩌면 이런 삶이 있을까, 싶어서 눈물이 났다. 이 삶은 내가 택한 것도, 내가 나쁘게 가려고 한 것도 없는데도 그렇게만 흘러갔다. '그 노래는 어디서 왔을까'란 말은, 이들의 삶이 이렇게 흘러간 이유는 무엇인가를 묻는 건 아닐까. 참혹하고 비참하고 비루하고 억지스러운 시대, 그 시대에서 누군가는 악랄하게, 누군가는 적당하게 타협하고, 누군가는 악을 쓰고 누군가는 미쳐버리는 것이다. 정말로 하고 싶고 정당한 말은 말이 될 수 없고 말이 될 수 없는 노래들만이, 진심으로 하고 싶은 말이 되는 시대. 






소설가 손홍규씨는 <당신은 어디서 왔을까>란 칼럼에서 "<그 노래는 어디서 왔을까>의 제목에서 '노래는 다른 낱말로 대체할 수 있다. 슬픔을 넣어도 되고 희망을 넣어도 된다. 혹은 화해나 용서를 넣어도 된다. 궁극적으로 이 소설은 '그 용서는 어디서 왔을까'라는 질문으로 되돌아간다. 그럼으로써 이 소설은 용서하되 결코 용서하지 않은, 양립이 불가능해 보이는 두 정서를 동시에 품는다. 이전까지 단 한 번도 용서한 적이 없던 그(공선옥 작가)가 최초로 용서했다"고 적었다. 


오랜시간이 흐른 뒤에 그 상황을 용서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일로 남을지도 모른다. 정애는 자신에게 악을 행한 누구에게도 복수하지 않는다. 정애는 자신이 노래를 부를 때 그들 스스로 부끄러워 몸서리치며 땀을 흘리는 것,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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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음알음2014.03.23 15:36


'심리학'이라는 학문을 처음 접했을 때(일반 교양 수준의 심리학), 나는 심리학이 불편했었다. 이 심리학의 이론들을 적용해서 '나의 행동을 무엇무엇이라고 간주'하는 것이 싫었다. 내 행동을 심리학 이론대로 해석해서, 저 사람은 지금 내 심리를 이렇게 읽고 있겠구나 하는 것이 불쾌했던 것이다. 마치 심리학이라는 안경을 쓰고 나의 마음을 꿰뚫어보고 있다거나, 그것이 정답이 아닐 수도 있는데 오해하고 있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지금 내 행동이 모두 내 어린시절의 환경과 관련이 있다거나 내 꿈이 모두 무의식에 켜켜이 쌓여 있던 것들의 발로라고 생각하는 것도 억지스럽게 느껴졌다. 어쩌면 나의 어떤 행동들이 어린시절의 결핍에서 나온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기 싫었다. 좀 편협하긴 했지만 '많이 가진 것이 결핍보다는 우위에 있다'고 생각했던 시절이니까.


그러다 이것은 그저 하나의 관점이고 사람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하나의 툴이다, 그리고 그것이 매우 유효할 수도 있다고 인정하게 됐다. (아직도 심리학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고 생각하고, 오류를 범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사람들이 왜 심리학을 배우고, 심리관련 서적을 읽는지, 그리고 '힐링'이라는 단어가 유행처럼 퍼진 것에 대해서 '그것이 중요한 것'이라고 인정하게 됐다. 인간과 세계를 '이해'하는 것이 학문이라면, 심리학은 둘다를 하는 공부라고 생각하게 됐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심리학을 잘 몰랐다. 여전히 잘 모른다. 깊게 공부해본 적도 없고, 유행하는 서적들을 모두 읽은 것도 아니다. 힐링카페에 가본 적도 없고, 사주카페도 안 간다. 그러니 단지 싫어했던 것이다. 심리학을 싫어하는 이런 감정 상태를 심리학에선 뭐라고 진단할지 궁금하다. 아마 '자존심을 건드렸다거나' '자신을 드러내기 싫어하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정신과'에 오기 싫어하는 사람들의 심리처럼.


여하튼 이렇게 말을 꺼낸 것은 <도시 심리학>(해냄출판사, 2009)이란 책을 읽으면서 심리학이 가깝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시골에서 자라서 대학 입학 이후 시작된 '도시에서의 삶'은 종종 객관화된 대상이 되었다. "화려한 도시가 시골을 소외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 도시가 자연에서 소외되었다"고 믿었으니까. 가까이 스치는 사람은 더 많고, 길가다 마주치는 사람의 밀도도 더 높은데 도시생활은 '더 외롭다'. 즐거움의 대상도 많지만, 막상 가고싶은 장소가 없다. '상대적인 판단'이긴 하지만 도시의 삶은 그렇게 사람들의 마음을 다치게 하고 있다. 그런데 <도시 심리학>은 그렇게만 보지는 않는다. 왜 사람들이 도시에서의 삶에서 벗어날 수 없는지, 또는 도시에서의 사람들의 삶을 그것 자체로 긍정한다. 그리고 이 책에도 많은 심리학 이론이 등장하지만, 과도하다거나 무리하다고 느껴지지는 않았다.


촌스럽긴 하지만 도시에 사는, 도시 문화를 향유하는 사람들을 '도시인'이라고 해보자. <도시 심리학>은 도시인은 왜 커피와 와인을 즐기고, 커피와 와인에서 개인적인 취향을 드러내려고 할까. 도시인은 왜 외모에 신경을 쓰고, 성형외과에 찾아가는 걸까. 도시인들은 왜 지름신에게 자신의 경제권을 넘기는가. 도시인들은 왜 첨단문명의 시대에도 점을 보러 가는가. 도시인들은 왜 개인정보에 민감하면서도 대리운전은 쉽게 이용할까. 등등, 일상에서 내가 하고 있고 내가 궁금해했던 행동들, 감정들, 현상들에 대해 심리학적으로 풀어주는 책이다. 하지현 교수의 개인적인 경험담도 거부감을 덜어내준다. 우리가 모두 그렇게 살고 있으니까. 


예를 들어, 지름신이 내려 과도한 쇼핑을 했을 때 오는 쾌감과 죄책감. 저자는 지름신을 미워하지 않는다. 도시인에겐 그 만한 치유의 방법이 필요하니까. 그러니까 <도시 심리학>은 우리의 행동 패턴과 욕망을 분석하고 그것을 나무라지 않는다. 규범과 법에 어긋난 일에 대해 권장하진 않지만 그럴 일을 벌이는 동기가 무엇인지를 짚어준다. 그리고 시간을 갖는 것이다. 이 분석대로 라면 나의 심리 상태는 어떤 것이고, 내 행동이 이런 잘못된 심리에 뿌리를 두고 있구나, 내가 이해할 수 없었던 것들이 이런 이유였고 그래서 고치고 싶다면 해결 방법은 무엇인가 하고 가만가만 생각하다 보면, 굳이 (필자가) 나무라고 주장하지 않더라도 자연히 판단하게 될 것이다. 물론 그게 곧 치유로 이어질 수 없을 수도 있지만.





총4장으로 구성된 이 책에서 저자는 최소한의 소통으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끈을 이으려는 이들에게는 타자에 대한 거부감과 아울러 잊기 힘든 대양감이 도사리고 있음을 드러내고(1장 ), 커피전문점에서는 까다롭기 그지없어도 커피믹스에는 관대한 마음에서는 개성화와 사회화의 극단을 발견하며, 실연을 탓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는 행위는 불완전한 삶에 대한 자기애적 폭력임을 일깨운다(2장 ). ‘지름신 강림’을 빌미로 자기합리화에 익숙한 현대인들과 24시간 꺼지지 않는 편의점과 김밥집이 채워주는 만족이 팽배한 이곳의 삶을 추적할 뿐 아니라(3장 ), 놀이공간에서도 빠지지 않는 사회적 정체성, 학연·지연·혈연을 떼놓고는 견뎌내기 힘든 자기확신감 부족 증세를 면면이 파헤친다(4장 ).



(출판사 '해냄'의 서평 중에서)



 모던보이로 알려진 작가 이상(李箱)의 1937년 수필 <권태>(倦怠)에는 단조로운 벽촌생활의 지루함을 기록하고 있다. 그는 '모던보이'였으니까 도시를 떠나 벽촌생활을 하면서 사는 것이 지루했던 것이다.


다음은 마지막 단락의 원문 일부이다.

〈그럼 오늘 하루를 나는 어떻게 지냈던가? 이런 것은 생각할 필요가 없으리라. 그냥 자자! 자다가 불행히, 아니 다행히 또 깨거든 최서방의 조카와 장기나 또 한 판 두지. 웅덩이에 가서 송사리를 볼 수도 있고, 몇 가지 안 남은 기억을 소처럼 반추하면서 끝없는 나태를 즐기는 방법도 있지 않으냐? 불나비가 달려들어 불을 끈다. 불나비는 죽었든지 화상을 입었으리라. 그러나 불나비라는 놈은 사는 방법을 아는 놈이다. 불을 보면 뛰어들 줄도 알고 평상에 불을 초조히 찾아다닐 줄도 아는 정열의 생물이니 말이다. 그러나 여기 어디 불을 찾으려는 정열이 있으며, 뛰어 들 불이 있느냐? 없다. 나에게는 아무것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내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암흑은 암흑인 이상, 이 방 좁은 것이나 우주에 꼭 찬 것이나 분량상 차이가 없으리라. 나는 이 대소 없는 암흑 가운데 누워서 숨쉴 것도 어루만질 것도 또 욕심나는 것도, 아무것도 없다. 다만 어디까지 가야 끝이 날지 모르는 내일, 그것이 또 창 밖에 등대하고 있는 것을 느끼면서 오들오들 떨고 있을 뿐이다.〉


 '초록'마저도 권태를 불러왔던 생활이라니! 수많은 도시인들이 주말마다, 휴가마다 도시를 떠나 자연으로 자연으로 떠나고 있는데. 사실 도시인들은 도시를 떠나 생활하지 않을 것임을 알기에 자연으로 가는 것이겠지, 실제로 벽촌생활을 하게 되면 '중독성 강한 도시생활'을 그리워하지 않을까. 어려서부터 도시에서 살지 않은 나는 초록이 지겹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늘 탈도시를 꿈꾼다. 도시인의 수많은 욕망은 버리지도 못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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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음알음2014.03.15 12:03



오후 5시가 늘 고비다. 고개는 책상 위 컴퓨터 모니터를 향해 점점 더 진출하고, 허리는 자연스레 둥그렇게 말아지는, '바르지 못한 자세'의 절정이 되는 시기. 여느 직장인들이나 느끼는 피곤의 절정. 단 것도 당기고, 머리도 멍해지고, 일의 처리 속도와 상관없이 하염없이 피곤의 블랙홀 속으로 빨려드는 시기. 그래서 가끔은 '내가 컴퓨터처럼 기계가 아닐까'하는 착각이 들 때도 있는, 그런 때.






그럴 때, 이 소설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작년 봄엔가 읽은 서유미의 <당분간 인간>(2012, 창비)(단편소설들을 모아 낸 소설집으로, 여러 소설 중에서도 '당분간 인간'이란 소설이 특히 더 기억에 남았다.)의 주인공처럼 내가 "부스러기가 되거나 물컹물컹 액체 덩어리가 돼서 녹아버리는 건 아닐까"하는 다소 공포스러운 걱정이 뇌리를 스쳐갔다. 그 만큼 이 소설의 설정은 너무나 명징한 메시지를 주었다. 우리가, 인간이 자연에 속한 온전한 생명체로 살고 있는가. 라는 물음이 몇번이나 찾아왔다. 직장도 곧 사람들이 꾸리는 삶의 장소인데, 그 안에 있으면 나는 사람이지만 '일의 영역'인 만큼 스트레스와 피로의 근원임에도 틀림없다. 누군가의 괴롭힘이나 일의 많고 적음을 떠나, '삶의 유지를 위해 일을 해야만 하는' 현대인들이 얼마나 힘들게 버티고 있는지 나는 이 소설을 보며 나를 보고 사람들을 보고 현대사회의 슬픈 인간의 자화상을 보았다.


<당분간 인간>에 등장하는 인물 O. 월급을 떼인 채로 실직자가 됐다가 새로운 회사에 들어간 O는 친구 Q의 집에 얹혀 살게 된다. O는 몸이 딱딱하게 경직되는 증상이 나타났고, O가 새로 들어간 회사의 전임자는 몸이 물렁해지는 증상이 나타나 회사를 그만뒀다. O는 결국 전임자가 물컹한 젤리가 돼 무너져 내리는 장면을 목격한다. 

Q는 결국 O가 와르르 부서지는 장면을 목격한다. 


두 사람의 증상의 원인은 과도한 스트레스와 피로라고 의사는 진단한다. 그리고 그런 증상이 자주 나타난다고. 스트레스라는 옷을 입고는 수많은 강박이, O와 O의 전임자를 무너져 내리게 만들었다. 그들은 당분간 인간, 이었을 뿐이었다. 회사는 O의 전임자처럼 너무 물러터진 인간이나 O처럼 융통성이 없는 인간을 원하지 않았다.



Q는 O의 경직된 얼굴을 보고 왜 그렇게 되었느냐고 묻지만, 단절된 두 사람의 관계에서 "사실 부스러기도 좀 떨어져"라는 증상은 아주 경미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곧 O가 무너져 내릴지도 모른다는 걱정은 따라오지 않았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의 아픔이나 슬픔, 힘든 상황을 아주 정확하게 잡아내기 어려운 건 우리가 타인의 상황에 관심을 기울이기엔 너무 척박한 환경에 살고 있어서가 아닐까.




"요즘 얼굴과 목이 딱딱하게 굳고 심할 경우 갈라지거나 금이 간다고 병원에 오시는 분들이 부쩍 늘었습니다. 반대로 몸에 힘이 없고 물렁해진다고 호소하는 분들도 계신데요."


인간사회에서 벌어질 수 없을 것 같은 어떤 증상이 나타나는 사회, 이 소설이 현실과 많이 다르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언제라도 부서질 수도, 물렁해져 녹아버릴지도 모른다. 그래서 당분간만 인간으로 살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결론은 내 몸이 부서지기 전에, 녹아버리기 전에 인간으로서의 살아남아야지 하는데, 그게 최소한의 인간으로서 삶이 내 의지대로 되는가 라는 막연한 질문 앞에 멈춰선다. 사람들이 힐링에 열광하는 건, 아니 힐링을 찾을 수밖에 없는 건 다 그 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라고. 힐링이 근본적인 답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런 생각을 해본다. 이런 주말에 그대도 나도 모두가 편안하게 쉴 수 있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다행이냐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슬픈 일이냐고.

Posted by sokhm
알음알음2014.03.11 16:11


전 세계에서 성형수술을 가장 많이 하는 국가는 미국이다.  인구 1000명당 성형수술을 가장 많이 하는 국가는 한국이다. 미국과 한국은 (안에서나 밖에서나) 모두 '성형공화국'으로 불린다. 미국 사회학자 로리 에시그는 <유혹하는 플라스틱>(2014.1, 이른아침)에서 "성형수술과 미국 경제의 붕괴 사이에 어떤 연관관계가 있는지"를 말한다. 플라스틱 서저리. 성형수술. 플라스틱 머니. 신용카드. 미국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플라스틱'에 대해 고찰한 책이다. 이 책은 '성형'이라는 구체적인 행위가 이뤄지는 역사적, 사회문화적 배경을 먼저 짚었다. 전쟁과 우생학, 영화의 시대 등장 등등. 


플라스틱 머니와의 연관성은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터지면서 더 긴밀하게 드러났다. 신자유주의는 모든 것의 결과를 개인의 책임으로 돌렸다. 저자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 안에서 우리 모두는 우리가 가진 문제들이 우리의 것이며, 오로지 우리들만의 몫이라고 믿어야만 했다. 한 사람의 실업은 그 사람 개인의 이슈였다. 1500만 국민들의 실업도 여전히 각 개인들의 이슈였다. 신자유주의 수사법에 대한 한 분석은 '갈수록 많은 공공의 이슈들이 개인적인 생활양식상의 애로와 문제들로 규정되었다.'고 말한다. 개인이 어떻게 더 나은 삶은 얻느냐의 문제는 오로지 개인에게 맡겨질 뿐, 국가와 사회의 목표는 아닌 것이다."고 지적한다. 그렇다면 이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는 어떻게 인간의 몸을 바꾸려는 시도로 나타나게 되었을까.


"미국인의 육체(정치체제와 말 그대로의 육체 모두)는 이 새로운 질서의 자발적인 인질이 되었다. 의료산업의 규제를 풀고 금융업이 새로운 형태의 신용을 창출하도록 허용해서 대다수 국민을 경제적으로 더 불안하게 만든 신자유주의는, 마침내 평범한 미국인들의 육체에 성형수술이라는 형태로 아로새겼다."




미국인들은 경제불안에 대한 해소의 방법으로 집단행동이 아니라 완벽한 집, 완벽한 주방, 완벽한 차, 완벽한 몸을 만들어내는 게 개인적 과업의 성취 여부에 달려있다고 믿게 됐다. 그럼으로써 미국인들은 '신용카드'라는 플라스틱을 이용해 더 많은 빚을 지게 됐다. (저자는 미국인들이 이러한 패턴에 빠지는 게 것을 "자신이 열심히 하면, 미래에는 더 나아질 것이라는 낙관주의"라는 미국인들의 정체성과 연관이 있다고 봤다. 한국인들에게서도 자주 들었던 그것. We can do it.) 



구체적인 예로, 1982년 미 연방대법원은 의사들에게 광고를 허용했다. 그 이전에도 의료광고는 허용했지만 의사들에게 광고를 허용하지는 않았었다. "연방거래위원회는 신자유주의 논리로 의료계에서도 '시장의 마술'에서 이익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88쪽)

그로부터 환자들은 이제 고객이 된다. (성형수술 광고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아도, 너무나 쉽게 접할 수 있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광고가 얼마나 교묘하게, 사람들을 유혹하는지는 누구든지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성형수술을 하도록 유인하는 방법으로 '비용'을 절감한다거나, '비용'을 지금 지불하지 않아도 된다고 사람들을 현혹하는 것이다. 이는 플라스틱 머니가 있으므로 가능해진다. (미국에서는 '의료신용'이 존재함으로써 부자 의사들은 더 부유하게, 가난한 환자들은 더 가난하게 만들었다.)


"유방 성형을 받을 여력이 없다고? 대출을 받아! 그리고 걱정하지 마. 모든 일은 좋아지기만 하니까. 비용은 미래에 갚으면 돼. 유방 성형이 더 나은 직업과 더 좋은 남편을 얻게 해준 다음에 말이야. "(105쪽)

저자는 플라스틱 소비가 건네는 미래의 약속에 유혹된 사람들-우리 모두-는 이처럼 완벽함의 약속에 유혹돼 스스로 플라스틱의 노예가 되었다고 말한다.



 문화적인 요소로는  TV, 대중문화의 영향이 크다.  대중문화가 곧 성형에 대한 수요를 불러오고, 이는 성형산업을 키우고 있다. 또 미국의 한 의사는 "성형수술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과체중처럼 보이게 하는 의복 때문에 생긴 불가피한 결과다"라고 했다. (145쪽) 패션이 문제라는 말이다. 기성복에 몸을 끼워맞춰야 하는 현대사회에서, 거의 모든 옷은 날씬하지 않은 사람들을 비정상적으로 보이게 만든다. 화장품, 다이어트 제품 등 미용산업도 당연히 한 몫 한다.


저자는 연예인이 아닌 평범한 사람들조차도 완벽한 육체를 원하게 된 이유를 '플라스틱 이데올로기 콤플렉스'라고 말했다. 이는 "성형과 관련해서 강력한 메시지를 전하는 문화적 각본들의 집합"을 말한다. 너무나 지배적이어서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그런 강력한.


그리고 이를 더 가속화하는 건 '자기 개선'이라는 의식. 


끊임없는 자기계발을 강요받는 건 한국도 마찬가지다. 경쟁에서 뒤처지는 건 개인의 잘못이고, 완벽하지 못함은 그릇됨으로 인식된다. ( 성형에 대한 인식이 바뀌어서 긍정적인 이미지를 생산하고 있지만 여전히 모태미녀, 민낯미녀 등의 조어들이 등장하는 건 성형 이전의 완벽함을 추구하는 욕망에서 비롯된 것일 테다.) 태어날 때부터 완벽하지 않아도 개인적인 노력으로 완벽해질 수 있다면, 그렇다면 자신의 정서적 경제적 불안이 해소될 것이라고 믿게 되는 것이다. 


책을 읽다보니,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하는 책 말미의 글이 궁금해졌다. 특히 개인으로서 우리는. 


2008년 금융위기는 미국 성형외과들에게도 타격을 입혔다. 하지만 1년여가 지나고부터 다시 회복하기 시작했다. 오히려 사람들이 직업을 잃었기 때문에 성형외과를 더 찾아온다는 주장도 있었다. 또 미국 안에서만 성형산업과 성형신용을 규제한다고 해서 끝날 일도 아니었다. 저자 말대로 이제는 글로벌 플라스틱 시대가 되었으니까. 문화가 바뀌지 않는 한 정부의 규제로는 이 흐름을 거스르기 힘든 것이 되었다. 그렇다면 이런 문화를 양산한 신자유주의가 붕괴한다면 어떨까.


이 책의 마지막 장의 제목은 <플라스틱 공화국의 미래>다. (책장을 넘기기 전 어느 정도의 해답이 있길 바랐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아름다움이 보편적이라고 주장하는 과학과 싸워야 한다."

"우리는 모두가 똑같은 모습이 되기 위해 애써야 한다고 말하는 대중문화에 저항해야 한다."

"우리는 은행과 의학을 규제하는 제도적 장치들을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문화란 개인적인 과제가 아니다 ."고 말한다.


영원히 젊음을 유지할 수도 없고 유지할 필요도 없다.

인간의 아름다움을 포기하란 말이 아니지 않는가.

다양성을 인정하는 문화, 그게 그게 답에 가까워 보인다. 



이 책의 마지막 문단은 이렇게 정리돼 있다. " 무한한 기회가 열린 완벽한 꿈의 전경이 아니라. 모든 국민에게 기회가 골고루 배분되는 나라, 개개인의 모두의 삶이 완벽하지는 않지만 충분히 좋은 국가를 만들어야 한다. 우리가 완벽에의 추구를 멈출 때,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충분히 좋은 그런 사회를 요구할 때, 우리가 사는 나라는 플라스틱의 제국이 아니라 사람 사는 실제  세계로서의 국가가 될 수 있다."



■각 나라별 성형수술(절개 + 비절개) 총량 비교 (단위 : 만명)

미국 311                                                                                 



브라질 114

중국 105

일본 95

멕시코 79 

이탈리아 70

한국 65

콜롬비아 37

대만 18

그리스 14


*인구 1000명당 성형수술

한국 13.5

그리스 12.5

이탈리아 11.51

미국 9.89

콜롬비아 8.21

대만 7.82

일본 7.48

브라질 7.26

프랑스 6.94

멕시코 6.91

※국제미용성형수술협회(ISAPS 발표, 2011년 기준)/이코노미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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