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小小

영화 <또 하나의 약속>를 보고난 후



"멍게는요 태어날 때는 뇌가 있는데, 바다 속에서 자리 잡고 살기 시작하면서 뇌를 소화시켜 버린대요."


영화 <또 하나의 약속>에 나오는 대사. 택시기사 상구(박철민 분)가 노무사 난주(김규리 분)에게 한 말이다. 멍게가 동물이냐, 식물이냐 묻고 "멍게는 처음에는 동물이었는데, 나중에는 식물이 된다"고 하며 한 말이다. 그는 딸을 멀리 떠나보낸 뒤였다. 이 대사가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가장 절실한 메시지가 아닌가 싶다. 무엇이 문제인지,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며 살아야 하는지를 되짚어보게 한다. 상구는 속초에서 택시기사를 하며 평범하게 살아가는 아버지. 그의 딸은 굴지의 진성그룹에 취직하지만 1년반 만에 백혈병에 걸려 세상을 떠난다. 딸 윤미가 일했던 반도체 공장에선 윤미처럼 백혈병이나 희귀병에 걸린 노동자들이 많았다. 이 영화는 상구가 딸의 죽음이 산업재해임을 인정받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다들 질 싸움을 왜 하느냐고, 딸의 목숨값을 받아내려 하는 것이라고, 빨갱이 물이 들어서 그러는 거라고 그를 비난하지만 상구는 딸에게 바보같지 않은 아빠가 되기 위해 온힘을 다한다.



알려졌듯이 '또 하나의 약속'은 삼성전자에 다녔던 고 황유미씨의 아버지 황상기씨의 사연을 위주로 만들어진 영화다. 


2011년 7월 산재 판결 이후 황상기씨와 반올림을 인터뷰한 적이 있다. 그는 근로복지공단 측에 행정법원의 판결에 항소하지 말 것을 요구하기 위해 근로복지공단을 찾았다. 영화에도 나왔듯이 공단 측은 항소했고, 재판은 진행 중이다. 그는 "산재 판결 이후에도 달라진 점은 없다"고 말했다. 2011년에서 시간은 흘러 2014년. 여전히 달라진 것은 없어보인다.


“삼성반도체 산재 판결 뒤에도 달라진 게 없다” (2011.7.5)

ㆍ백혈병 사망 노동자 황유미씨 아버지 황상기씨

5일 새벽 5시30분. 황상기씨(56)는 강원도 속초에서 서울행 버스에 올라탔다. 황씨의 이름 앞에는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으로 숨진 고 황유미씨의 아버지’라는 긴 수식어가 붙어 있다. 황씨 등 일부 유가족은 지난달 23일 서울행정법원으로부터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낸 ‘유족급여 및 장의비 부지급 처분 취소 청구’ 소송에서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받았다.

황씨가 다시 서울에 온 이유는 “근로복지공단에 항소하지 말라고 촉구하기 위해서”였다. 오전 10시30분쯤 영등포 근로복지공단 정문 앞에서 만난 황씨는 “산재 인정 판결 이후 달라진 점은 하나도 없다”고 했다. 그는 “삼성에서 일하다 병이 든 환자 수가 140명에 달하는데 산재 인정 승소는 2명뿐”이라며 “나머지 환자들도 산재 인정을 받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황씨와 피해자 가족 5명은 이날 오전 10시50분쯤 근로복지공단 1층에서 ‘이사장과의 면담’을 요청하며 이사장실로 이동하려 했지만, 공단 측이 엘리베이터 작동을 중지하고 비상 계단 출입문을 봉쇄하면서 직원들과 몸싸움을 벌여야 했다. 황씨는 “근로복지공단은 노동자를 위한 곳인데 사용자에게 면죄부를 주는 곳으로 바뀌었다”며 “산재를 승인해주지 않기 때문에 수많은 노동자들이 죽어나간다”고 항의했다.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으로 숨진 황유미씨의 아버지 황상기씨가 5일 서울 영등포구의 근로복지공단 로비에서 이사장과의 면담을 거절당하자 항의하고 있다. |강윤중 기자 yaja@kyunghyang.com


승소 판결을 받는 순간 어떤 심경이었을까. 황씨는 “유미와의 약속을 일부 지켰다는 것에 기뻤다”고 말했다. 생전의 딸에게 “개인적인 질병이 아닌 산재라는 것을 밝히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그는 “전문대라도 가라고 했는데 유미는 남동생(당시 중2)을 대학에 보내겠다며 삼성에 가겠다고 했다. 그 남동생은 어느덧 자라 올 10월 군 제대를 앞두고 있다”고 말했다. 

속초에서 30여년간 택시운전을 해온 황씨는 “딸이 아프기 전에는 평범한 집이었다”고 했다. 이어 “유미가 아프니까 수원의 병원에 다니느라 바빴고, 유미가 죽은 뒤에는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뛰어다니느라 집안 꼴이 엉망이 됐다”고 말했다. 

황씨는 1979년 속초에 마련한 신혼집에서 세 자녀를 모두 낳았다. 68년에 지은 집이 낡아서 새 집을 지으려던 즈음 유미씨가 아프기 시작했다. 그는 “유미가 항암치료를 시작한 뒤 한 달간 집에 와 있었는데 유미 할머니가 손녀딸을 보고 충격을 받아 돌아가셨다. 유미 엄마는 우울증을 앓고 있다”고 했다. 황씨는 지난 4년간 한달에 5~6번은 서울에 왔다. 

법원은 함께 소송에 참여한 고 황민웅씨와 투병 중인 김은경·송창호씨 등 3명의 산업재해는 인정하지 않았다. 이날 고 황민웅씨의 부인 정애정씨(34)도 황상기씨와 함께 근로복지공단을 찾았다. 정씨는 1심 판결에 불복해 항소할 계획이다.

황씨는 근로복지공단 측이 항소하지 않겠다는 공식 입장을 밝혀주기를 바라고 있다. “언제 속초로 돌아가느냐”는 질문에 황씨는 “항소 안 하겠다는 확답을 받기 전에는 계획에 없다”고 했다. 삼성반도체에서 일하다 백혈병에 걸린 노동자들을 도와온 ‘반올림’의 이종란 노무사는 “산재의 취지가 신속한 보상이고, 보통 한 달 걸리는데 이 경우 4년이 걸린 것이다. 항소하면 또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다”고 했다. 근로복지공단 관계자는 “항소를 할지 말지 권한은 근로복지공단에 없고 검사한테 있어서 판단할 능력이 없다”고 말했다.

황씨의 딸 유미씨는 2003년 10월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부에 입사해 일하다 2005년 6월 백혈병 판정을 받았다. 이듬해 10월 사표를 냈고 2007년 3월6일 유미씨는 병원으로 가던 길에 황씨의 택시에서 숨을 거뒀다. 황씨는 “가족들이 역학조사에 참여도 못하는데, 증명을 가족이 해야 하는 직업병 인정 절차를 고쳐야 한다”며 “삼성이 사과하고 다른 환자들도 산재를 인정 받아야 유미와의 약속을 100% 지켰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고 말했다.



영화는 이 싸움의 지난한 과정을 보여주는데, 설명하는 데만도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했다. 그것이 그동안 너무나 잘,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고 그 과정 자체가 영화같은 이야기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인터뷰에서 밝혔듯이 황상기씨가 딸 유미씨와 한 약속을 100% 지키기까지는 얼마나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한지 알 수 없다.


<또 하나의 약속>에서 딸 윤미가 부른 노래를 들을 때와 윤미의 엄마 정임(윤유선 분)이 딸의 일기장을 읽는 부분에선 인간적인 슬픔에 접근한다. "다시 태어나면 엄마 아빠의 부모로 태어나서 은혜를 갚고 싶다"는 딸의 목소리가 절절하다. 이 장면이 특별히 슬픔을 만들어냈다기보다 극 전반에 흐른 불편하고, 슬프고, 아픈 감정들이 모아져 쏟아져나오는 기폭제같은 장면, 눈물이 났다. 이 영화와 이 영화가 다룬 실화가 주는 메시지는 무엇보다도 '사람에 대한 존중'이다. 그리고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또 하나의 약속>은 예매율에 비해 상영관 수가 적어 외압 의혹이 일었다. 이 영화에 앞서 연극 <반도체 소녀>와 <택시 택시>에서도 삼성전자 백혈병 문제를 다뤘다. 또 외신들은 이 문제를 보다 중요하게 다뤘다.


독일공영TV 시사프로그램, 삼성 직업병 문제 다뤄

한국영화 ‘또 하나의 약속’…영국 ‘가디언’ 메인 장식


모두가 떠들썩하게 챙겨보지 않더라도, 느리게라도 조금씩 관심을 넓혀가고 있는 듯하다. 또 하나의 약속을 계기로 다시, 침묵하지 않도록, 잔잔하지만 영화의 울림이 큰 울림이 되기를. 멍게가 되지 않기를.